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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두 개의 미래, 저출생과 4차 산업혁명
2018-11-28 11:58:27 2018-11-28 11:58:28
서로 다른 두 개의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두 개의 미래는 각기 다른 길을 통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두 개의 미래는 소실점에서 만나 새로운 풍경을 완성하게 된다.  그 풍경이 아름다울지 혹은 그로테스크할지는 아직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개의 미래가 만나 완성될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크다. 결과에 따라서는 지금 한국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불행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두 개의 미래 중 하나는 저출생으로부터 출발한 인구절벽의 사회다. 저출생이 지속되면 산업노동력이 부족해지고 그로 인해 세수도 줄어들면서 국가 운영에 치명적 허약성을 가져오게 된다. 노동력뿐만이 아니다. 미래의 노동자인 학생들이 줄어들면서 교사와 교수들의 숫자도 줄어들게 된다. 군인이 줄어들면서 장교 역시 줄어들고, 전체 인구가 줄어들면서 공무원 역시 줄어들게 된다. 의학의 발달로 노인들의 수명은 늘어나면서 소수의 젊은 세대가 다수의 노인 세대를 책임져야 하는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국가의 쇠망 또는 죽음이 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존속 및 성장을 하려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사태다. 
 
이런 불행한 사태 이면에는 생물 유기체인 호모 사피엔스의 비극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종족 번식에 대한 본능적 욕망을 자제하거나 포기하고 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지구가 탄생한 이래 모든 유기체는 종족 번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호모 사피엔스만이 일반 질서에서 벗어난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미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미래는 하나의 꿈이고 가능성이었다. 현실이 좀 팍팍해도 그럭저럭 살다 보면 좋아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 믿음이 거부당했다. 현실 외에 다른 시간은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하나의 미래는 기술 발전이 가져올 스마트한 미래사회다. 이제는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4차 산업혁명이 준비하고 있는 화려한 세상이다. 재생에너지를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자율주행차가 돌아다니며 일과 주거의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스마트 시티에서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의 시중을 받으면서 편하게 살 수 있는 미래가 곧 다가온다. 그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이 있겠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에는 다 극복된다고 믿는다. 기업, 대학, 연구소뿐만 아니라 국가, 시민사회단체, 종교,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혁명이 끝나고 나면 유토피아가 시작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저출생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민들은, 특히 젊은 세대는 4차 산업혁명의 미래를 그다지 신뢰하고 있지 않다. 나와 무관한 데다, 미래의 일이다. 살기 힘든 각박한 현실부터 해결해야 한다. 기술 발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동의하지만 그 결과가 내 미래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미래에는 더 살기 힘들 것이라는 부정적 생각으로 가득하다. 새로 출시되는 정보통신 기기에 가장 친화적이며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들을 즐기고 있지만 기술 발전과 미래를 연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 발전과 상관없이 미래를 암울하다고 예측하고 있다.     
 
저출생과 4차 산업혁명, 이 두 개의 미래가 만나는 미래의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로서는 완성된 그림이 상상되지 않는다.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은 여러 차례 급진적으로 발전해 온 사례가 있어 4차 산업혁명의 미래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인구 감소는 역사적 선례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구 감소의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체감되는 불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기술의 발전이 인구감소 속도를 줄이고 궁극적으로 적정 출생률을 유지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지속적 인구 감소로 기술 발전 자체가 무의미한 상태로 남아있게 될까. 
 
이 지점에서 질문을 재구성해보자. 사람들은 언제부터 미래를 의식하게 되었을까. 미래는 가공의 시간인데 왜 미래를 현실보다 더 두렵게 여기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 중 가장 절실하게 동의되는 것은 일상의 불안함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데 앞으로도 나아질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는 줄어들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의지가 없어 보이니 결국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 끝내 저출생이 그 솔루션이 되고 있다. 기술의 발달이 행복한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 이전에 예측 가능한 가까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없고 기술만 남는 시대가 가장 끔찍한 미래다.
 
김홍열 성공회대 겸임교수(firrenz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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