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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5화)역사를 쓰는 사람들
“남하고 사는 세상이란다”
2016-12-12 06:00:00 2016-12-12 06:00:00
하루하루가 격동이다. 대한민국은 평소에도 역동적인 나라이지만 지난 몇 주간은 가히 소용돌이가 몰아친 시간이라 함직하다. 나날이 파헤쳐지는 진실에 경악하고 불의에 분노한 국민들이 앞장서 정국을 이끌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촛불의 물결 속에 서 본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각자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마음에 새겼으리라. 마침내 제18대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오로지 국민의 힘이다.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인 국민들은 오늘도 첩첩산중의 길을 계속해서 헤쳐가고 있다.
 
역사를 만드는 ‘보통사람들’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한 노태우는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 당시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해서 인구에 회자되었었다. 광주학살의 주범으로 11대·12대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과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37년 전인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그 이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제진압의 공범인 그가 ‘보통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그 표현 자체가 희화화되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기업과 결탁해 조성한 수천억 대의 비자금에 대해 1997년 대법원이 전두환에게 2205억 원, 노태우에게 2628억 9600만 원의 추징금을 판결한 후, 전두환은 본인의 전 재산이 29만원입네 운운하며 지금까지도 일부만 내고 버티는 반면, 노태우는 완납을 했으니 그나마 훨씬 양심적인 셈이다. 당시 법정에서 보여준 태도 면에서도 전두환이 학살의 주범답게(!) 훨씬 뻔뻔했던 기억이 필자에게 남아 있다.
 
이번 국정조사에서 보인 김기춘, 이재용 같은 증인들의 뻔뻔함이나, 탄핵소추가 가결되었어도 여전히 자신의 성(城) 안에서 인식의 한계와 소통의 불가능을 드러내는 박근혜의 뻔뻔함은 과연 놀라운 수준이다. 이 뻔뻔함에 맞서 이 나라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힘은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며 함께 행동하는 이 땅의 진짜 ‘보통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어린 시절의 고은 시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어 많은 청소년들에게 낯설지 않을 ‘머슴 대길이’ 아저씨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우리에 넘겼지요
< … >
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르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한테는
주인도 동네 어른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 올라가서
홑적삼 처녀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겟작대기 뉘어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리는 듯하였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이란다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긴 불빛이었지요
(‘머슴 대길이’, 1권)
 
천대받는 ‘머슴’이라는 신분이었으나 그를 고용한 주인도 동네어른들도 대길이 아저씨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이유는, 시의 한행 한행이 보여주는 그의 인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 동네길”을 치우고 찬 겨울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드는 옷을 입고 일하지만, 시인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를 수 있음을, 이 세상이 “남하고 사는 세상”임을 일깨워주는 도(道)의 스승이다. 앞서 이 연재의 33화에서도 잠깐 시 구절을 인용했듯이, 그는 “8월 들어 / 머슴이라 주인네 일 틈내어 / 쉴 참 내어” ”임자 없는 무덤“들의 풀을 깍아주는 사람이고, 그런 그를 따라 ”동고티 동렬이도 거기 가서 낫질“하게 만드는 조용한 영향력의 사람, 행동으로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벌초’, 2권). 주위를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대길이 아저씨처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있다.
 
‘보통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하여
지난 토요일로 7주째 계속된 촛불집회의 참가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이들로, 각양각색의 직업군과 다양한 연령층에 속해 있다. 탄핵안 투표일을 며칠 앞둔 시점의 6차 촛불집회에 전국 232만명이 운집해 그 정점을 찍었지만, 그에 이르기 전부터 사람들은 이미 빽빽한 인파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평화적인 시위를 유지하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이는 7차 집회에서도 계속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많은 낯선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정의와 개혁을 소망하는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촛불의 광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3일 청와대 100미터 앞을 밝히던 촛불들 사이, 차벽에 기대어 선 한 중증장애인이 언어구사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절규하듯 구호를 외쳤다. 10일,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영하의 날씨 속에 촛불을 나누어준다.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이 곳곳에 보인다. 생업 때문에, 육아 때문에 혹은 또 다른 사정으로 인해 광장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소리 없이 모금에 손길을 보태거나 생업의 현장에 손팻말, 전단을 붙여두고 일을 한다. 한 언론은 ‘하야하라’ 배지를 달고 근무하는 대형마트 직원들의 소식과, 편의점ㆍ카페ㆍ빵집ㆍ아이스크림 가게ㆍ주유소 등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팻말 시위 동참 인증사진을 전한다. “우리는 매장에서 퇴진을 외친다.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촛불집회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민심이 표현된 구호가 점차 진화해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야’는 ‘퇴진’으로, ‘퇴진’은 ‘구속’으로 바뀌었다. 국회의 ‘탄핵소추’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빨리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를,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여전히 대통령의 ‘즉각퇴진’이 이루어지기를 민심은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른바 ‘박사모’를 활용한 반대세력의 공세도 눈에 띤다. 탄핵 가부 투표일이던 9일 국회 근처 뒷골목에 몰려 있던 적은 인원은, 10일 광화문 집회가 열리기 전 전국에서 몰려든 최대 약 1만 5천 명 추산의 50~70대 어르신들로 불어났다. 대부분 점심 이후 해산한 이들 중 몇몇은 순박하게도 ‘스스로 참여했다’는 것을 같은 방식의 표현법으로 강조하기도 하고, 관광버스와 도시락을 제공받아 서울 구경도 할 겸 올라왔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물대포에 희생당한 농민 백남기 어르신이 상경했던 것도 쌀 수입으로 인한 쌀값 폭락 때문이었는데, ‘탄핵취소’ 집회에 동원된 한 어르신도 쌀값 얘기를 하는 이 역설을 어찌 할 것인가. 역사와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을 교란시키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서울 남대문시장 야시장
촛불 켜놓고
촛불 춤추며 제사 지내듯 장사를 한다
시장 입구 가방 노점상부터
안쪽 도깨비시장까지
그 반코트
그 란제리
그 열쇠 자물쇠 장수
그 노리개장수
그 갖가지 방물장수에 이르기까지
일렁이는 남폿불 등불시장이 된다 제삿날밤이 된다
 
통금시간 임박
남폿불 하나씩 꺼지고 있다
노점상 하나씩
가게문짝 닫는다 생은 사이다
 
오직 시장 건너 길 건너
한국은행 본점 건물 야간전등이 환했다
전찻길도 텅 비었다
이윽고
은행 야간전등도 꺼졌다
비로소 밤하늘의 별이 있다 사는 생이다
 
남한 전력 19만킬로와트
그 전력을
쪼개고 쪼개어 썼다
 
모두 다 가난한 남폿불 호롱불
시장이 아니면
그런 불도 어림없다
집집마다
일찍 누워버리면 되었다
 
남대문시장 입구
< … >
하루를 끝냈다
 
오늘 엑스란 내의
빨간색 내의 두 벌 팔고
나일론 허드레치마
여섯 개 팔았다
 
또순이 아가씨
그녀 몸뻬바지춤
구겨넣은 돈 꺼내어 세어보니
한 다발 되어갔다
 
이만하면 오늘도 무난했다
저녁 걸렀으니
국수 사먹어야겠다
세상은 크고
사람은 괜히 클 까닭이 없다 생은 생이다
 
밤참으로 국수 먹어야겠다 사는 사이다
(‘남대문시장 입구’, 23권)
 
그날의 행진과 오늘의 행진
4·19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을 겪었던 사람들은 박근혜 퇴진 그리고 수많은 작금의 과제들―세월호 진실 규명, 재벌ㆍ검찰 개혁, 노동자ㆍ농민의 생존권, 개성공단 강제철거 중소기업, 사드배치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철회, 국정역사교과서 문제 등등으로부터 친일부역세력 청산에 이르기까지―을 해결하기 위한 현재의 시위가 갖는 형식적 차이에 감동하곤 한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질서 있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시위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2016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간 즈음, 이제 참여인원 백만 명 정도에는 익숙해진 국민들이,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평화의 촛불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국민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창조적인 집회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며, 수년 내로 이 놀라운 국민적 경험과 경탄스러운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 학술적인 분석과 연구가 대량으로 쏟아질 듯싶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앞서의 항쟁들도 정권이 최루탄을 혹은 총을 발포하지 않았다면 평화롭게 진행될 시위였다는 점이다.
 
1987년6월17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메고 있는 '이한열을 살려 내라'고 울부짖고 있는 연세대학교 학생 모습. 사진/뉴시스
 
< … >
너도나도 나섰다
모여들었다
공수 저지선 밀고 나아갔다
할멈도 돌멩이를 주워 날랐다
시장 아낙들도
삼립빵 샤니빵 가져왔다
여편네들도
김밥 날라왔다
무가당 주스도 가져왔다
모였다
비명이 아니라
함성이 터졌다
택시들이 경적을 울렸다
대낮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모여들었다
돌을 던졌다
각목을 들었다
만세를 외쳤다
도청으로 도청으로 나아갔다
 
< … >
 
최루탄 우박이 쏟아졌다
숨막히는 최루탄 가스가 깔렸다
최루탄 안개 속 아수라판
거기에
공수의 몽둥이
공수의 총검에
수숫대로 삼대로 쓰러졌다
풀섶으로 뒤엄으로 밀렸다
다시 밀어붙였다
 
그 에미애비 없는
공포의 공수가 밀려갔다
드디어 전남도청이 시민의 차지였다
그것은 맨주먹의 대폭발이었다
그것은 맨몸뚱이의 대승리였다
 
자 이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 … >
(‘대폭발’, 27권)
 
그날의 시위들과 오늘의 시위가 공유하는 모습 중에는 대길이 아저씨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함께 사는 세상’인지라, 김밥도 나누고 약도 나누고 담배도 나누고 헌혈로 피도 나누던 광주의 모습(‘나눔, 27권), 거리의 차들에 시민의 번호를 붙여 환자·화물수송과 청소·위생 업무를 담당하고 사재기 없이, 절도·강도 하나 없이 시민 스스로의 질서를 만들었던 ’우리‘의 모습('공동체', 27권)은 촛불집회에서도 발견된다. “세월호 엄마아빠가 촛불국민에게 받은 핫팩과 빵, 뜨거운 물, 마음을 촛불국민에게 돌려드립니다”라는 문구 옆에서 가슴을 나누는 유가족과 국민들이 있다. 귀갓길에 오를 때까지도 핫팩이 따뜻한 것은 서로의 가슴이 담고 있는 열망과 온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모두가 말하듯이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자 이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광주 동구 옛 도청 앞 분수대 광장 일대에서 5.18민중항쟁 27주년 전야제.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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