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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39화)모스크바여 안녕! 이상의 실현과 실패
2020-10-12 08:00:00 2020-10-12 08: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레닌 도서관 제1열람실. 이곳은 교수, 아카데미 회원,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 이용한다. 사진/필자 제공
 
도서관과 서점의 시간
 
<나는 모스크바를 걷는다>(1964)는 옛 소련 영화의 제목처럼, 귀국 전 남은 이틀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레닌(의 이름을 딴) 소련 국립 도서관’은 1992년부터 ‘러시아 국립 도서관’으로 개칭됐지만,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레닌 도서관의 별명인 ‘레닌까’로 부른다. 도스토옙스키 동상이 앞에 앉아 있는 레닌 도서관의 일부는 2019년 여름 한창 공사 중이었다. 내부에 들어가 보니 전산화된 도서관이 낯설고 새롭다. 90년대 레닌까에 대한 나의 기억 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은 장면은 긴 흰 수염의 한 노학자(로 보였다)가 책의 내용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손으로 옮겨 쓰는 모습이었다. 그 속도가 매우 느려 언제 다 베껴 쓰실까 걱정스러우면서도 그의 열정에 탄복을 금치 못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레닌 도서관에는 전자 검색 시스템과 함께 예전의 카드목록함들도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특정 열람실에는 옛 시절의 도서관 카드 목록함들이 전자 검색 시스템 속에서도 오롯이 존재감을 발하고 있어 반갑다. 이 초대형 도서관이 보유한 약 4740만 개의 자료들을 검색하는 데는 전자 목록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시대의 카드들도 분야에 따라 사용된다. 90년대 모스크바의 도서관들 중에서 부분적이나마 전산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었던 곳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사회과학 학술정보 연구소’(이니온)라는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하루에 5권의 책만 빌릴 수 있고 외부 대출은 불가능했으며, 자료 복사도 일일 20페이지만 가능한데다가 1~2일 후에 찾는 방식이라 논문 작업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결국, 나를 비롯해 한국 학생들은 외투에 책을 몰래 숨겨 나와 근처 복사 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책을 다시 가져다 놓을 때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선배 언니는 사서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고 5권 대신 10권의 책을 빌리기도 했다. 2015년 1월 이니온 도서관이 불에 타 대량의 귀한 장서들이 소실된 것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학계에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모스크바의 '돔 크니기'가 문을 연 1967년부터 52년째 일하고 있는 '노동 베테랑' 류드밀라 마르띄노바 씨. 그녀의 뒤로 방탄소년단(BTS), K-POP, 한국 요리책 등이 보인다. 다른 쪽에는 남북한 정치 관련 책들도 있다. 사진/필자 제공
 
모스크바 신(新)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국영 서점 체인점 ‘돔 크니기’(책의 집)에 들어가니 그 내부 역시 새롭다. 이곳에서 류드밀라 마르띄노바 씨를 만나 것은 행운이었다. 예술 부문 담당인 그녀가 한국 관련 책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는데, 그녀의 손에는 책을 찾기 위한 돋보기가 들려져 있다. “모스크바 돔 크니기는 52년이 됐어요(2019년 기준). 나는 서점이 처음 문을 열던 1967년부터 일을 시작해서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유일한 ‘베테랑 트루다’(노동의 베테랑)입니다. ‘베테랑’이기 때문에 눈이 잘 안 보이고 컴퓨터를 못 해도 돔 크니기에서 나를 계속 일하게 해 주어 고맙지요.” 서점의 역사를 한평생 함께 해 온 그녀는 1938년생, 81세다. 그녀가 담당하는 코너에 다른 손님은 없었지만 매니저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다가와 잔소리를 하기에 미안해진 나는 류드밀라 씨에게 급히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예전처럼, 도시 곳곳에는 길에 책을 늘어놓고 파는 노점들이 보인다. 신간 잡지도 있지만 가정에서 흘러나온 전집과 소련 시절의 잡지들도 있다. 한때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열리던 대규모의 책 도매시장에 가기 위해 새벽 5시면 기숙사를 나서곤 했다. 영하의 날씨 속에 흰 눈을 헤치고 찾아가던 책 시장도 그 시절의 한 풍경이었다.
 
러시아의 정치와 ‘검은 10월’에 대한 기억
 
국립 아카데미 극장 모쏘비에따의 공연 중간 휴식 시간. 러시아의 극장 문화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여서 휴식 시간 때 샴페인을 마시면서 극장의 역사가 담긴 공연 사진들을 관람하거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기도 한다. 사진/필자 제공
 
모스크바 시절 일상의 큰 낙이었던 연극을 한 편이라도 보고 떠나야 할 것 같아 온라인에서 예매를 했다. 예전에 표를 팔던 거리의 키오스크(간이매점)들이 아예 사라진 줄 알았더니 레닌도서관 지하철 역내에 하나가 보인다! 판매원의 말로는 공연 표를 파는 키오스크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키오스크에서는 매진된 공연의 좌석이 온라인에는 더 비싼 가격으로 많이 남아 있다. 다음엔 키오스크에서 사겠다고 다짐하며 표를 찾으러 티켓 판매 대행사를 찾아가는데, ‘모스크바 정부’로 불리는 시청 건물 맞은편에서 한 청년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모스크바 물리기술대학 프로젝트 관리자인 막심 야코블레프 씨다. 그는 2019년 9월 8일에 치러질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에 대비해 ‘스마트 투표’를 독려하는 중이다. 푸틴의 정적으로 알려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제안한 이 스마트 투표는 통합러시아당의 표를 뺏고 반대자들의 표를 하나로 모으기 위한 투표 전략이었다.
 
모스크바 정부(시청) 건물 맞은편에서 스마트 투표를 독려하는 1인 시위 중인 막심 야코블레프 씨. 사진/필자 제공
 
막심 씨와의 대화 중에 푸틴의 지지자인 한 노부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나무라기 시작한다. 막심 씨가 그녀에게 열심히 설명하려 하지만 그녀와의 논리적인 대화는 어려워 보여 나는 내 갈 길을 계속 갔다. 막심 씨는 푸틴의 지지도가 30~35퍼센트 정도로 떨어졌다고 했다. 러시아인들의 다수가 푸틴을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친구 스베따는 이렇게 분석했다. “다수의 관심사는 나라를 보전하는 데 있어. 푸틴 정권하에서 나라 내부가 안정되고 군대와 군수 산업이 발전하다보니 국가가 위협받을 때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든 거지. 소련을 해체시켜 버린 옐친과는 달리, 푸틴은 러시아가 해체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어.” “사람들은 90년대를 기억하고 아무도 그때의 상황이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아.” 미샤가 거들었다(이 친구들은 푸틴을 비판하지만 나발니의 지지자는 아니다). 스마트 투표는 영향력을 발휘해 2019년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와 여타 지방 선거에서 통합러시아당의 의석수를 줄였다.
 
스마트 투표를 독려하며 1인 시위 중인 막심 야코블레프 씨에게 한 노부인이 다가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붉은 색 건물이 모스크바 정부(시청) 건물이다. 사진/필자 제공
 
90년대 모스크바 시절에서 잊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은 1993년 10월 3~4일, 당시 대통령이던 옐친과 그를 지지하는 행정부 대 입법기관(의회)인 러시아 연방 인민대표대회와 최고회의(소비에트), 두 세력 간의 충돌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그해 9월 옐친은 자신의 경제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공산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인민대표대회와 최고회의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최고회의는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해 대통령을 탄핵하고 부통령 루츠코이를 대통령에 임명했다. 최고회의를 지지하는 군중이 10월 3일 대규모의 시위를 일으켰고 시장실 점거와 아스딴끼노 텔레비전 센터 진입을 시도했다. 옐친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0월 4일 군과 경찰, 장갑차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으며, 의회를 포격해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의회 건물 벨릐돔(현 정부 청사)은 불타고 의회는 강제 해산됐다.
 
1996년 10월 4일, 모스크바 시민들이 1993년 10월 4일에 살해된 '검은 10월'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10월 4일과 5일, 나는 사진기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교통이 끊기고 곳곳에 길이 막혀 걷는 수밖에 없었다. 옐친 세력과 의회 세력을 지지하는 두 시위대, 총을 든 군인들과 탱크,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부상자들로 뒤섞인 아수라장의 현장에서 나는 문득 광주를 떠올렸다. ‘검은 10월’로 불리는 이 사태는 광주보다는 적지만 많은 희생자들을 낳았고, 광주의 비극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몰래 돌아다녔듯이, ‘쵸르늬 악쨔브르’(검은 10월)라 쓰인 거친 화질의 비디오테이프가 러시아 친구들에게서 내게로 전해졌다. 
 
1993년 10월 5일 밤 모스크바 시내. 4일의 유혈 진압이 끝난 다음날에도 탱크들을 볼 수 있었다. 사진/필자 제공
 
소련이 남긴 유산과 끝나지 않은 이상
 
수상 빠호드, 2018년 6월 북카렐리야 무라셰바강의 급류를 통과하는 미샤와 스베따 부부. 사진/빅토르 그리보프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한 듯이 보이지만 인류의 그 첫 실험이 남긴 긍정적인 유산도 지대하다. 소련에서 ‘투리즘’은 보통의 ‘관광’과는 좀 다른 개념으로, 휴양소에서 쉬고 견학하는 조직적인 단체 여행도 의미하지만, 야생의 자연 장애물을 마주하는 자율적인 여행, 배낭을 짊어지고 행군처럼 장거리 하이킹을 하는 ‘빠호드’를 뜻하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 모든 직장에서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권을 살 수 있었고 후자의 경우도 직장이나 지역별 여행클럽을 통해 모인 사람들이 다양한 빠호드를 즐겼는데, 이 빠호드는 대중적인 문화였다. 친구 미샤는 30년 이상 강을 따라 빠호드를 다녔는데, 카약 같은 수상 여행은 특히 과학 기술 연구자들이 많이 즐기기 때문에 그의 연구소는 버스를 대절해 50명이 가기도 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순환선에 있는 키옙스카야 역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흐루시초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에 헌정한 역이다. 사진/필자 제공
 
모스크바의 지하철역 내부는 제각각 다르게 아름다운데, 건설 당시 ‘인민의 미의식을 제고하기 위해’ 건축가들이 경연을 했다는 구절을 소련의 미학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소련 역사 70년의 실험이 스승이신 바쥴린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제 겨우 하나의 나선을 완성한 것이라면, 인류의 이상은 실험을 거듭해 가며 새로운 나선을 그려가지 않을까.
 
모스크바 구아르바트 거리의 빅토르 초이(최) 추모벽. 그와 그의 그룹 '키노'의 노래를 젊은이들이 부르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뉴스토마토 (러시아 재발견)은 39화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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