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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세기적 이벤트 소떼방북, 경협 재합의
(7)1998년 11월18일 금강산 관광선 첫 출항
2018-09-01 06:00:00 2018-11-05 10:56:3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합의된 남북경제협력(경협)이 실행되기까지 다시 10여 년 세월이 소모되어야 했다.
 
가로 막혔던 변화의 조짐은 정권 교체기인 1997년 들어서야 나타났다. 1997년 4월 남측 대한적십자사가 구호식량 및 물품 제공을 제의하자 북측 조선적십자사가 호응하여 5월부터 남북적십자대표 접촉이 시작되었다. 현대, 삼성 등 재벌 기업들도 경협 가능성을 다시 타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25일 취임사에서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와 교류협력의 추진” 등 ‘대북정책 3원칙’을 발표했다. ‘햇볕정책’으로 불린 이 기조는 통일방안을 앞세우기보다 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 관계의 구체적 현안을 단계적·현실적으로 풀어가자는 것이었다. 교류와 협력을 통해 ‘공존의 변화 효과’를 노린 정책이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경협 관련 조치들을 발표했다. 1998년 4월1일 강인덕 통일부 장관은 “남북경협을 민간 자율의 원칙에 따라 대폭 허용 하겠다”면서 “대기업 총수가 방북 신청을 하면 이를 승인하겠다”고 발표했다. 3년여 동안 식량 위기를 겪어 외부 도움이 필요했던 북한은 1998년 4월11일 베이징에서 차관급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1994년 ‘조문파동’으로 당국 관계가 완전 두절된 지 3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 회담(4월11~17일)은 구체적 성과 없이 결렬되었지만, 4월18일 민간인의 방북 승인 조건을 대폭 완화한 통일부는 4월30일에 대북 투자 규모 제한을 폐지하는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로써 그간 묶여왔던 사회간접자본과 일부 중공업 분야 투자도 가능해졌고, 전략물자를 제외한 교역 품목과 투자 대상 규제도 사실상 없어졌다.
 
재계는 이에 호응하여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극복을 위한 돌파구로 경협을 상정하고 미뤄 뒀던 신규 사업을 모색했다. 삼성은 나진·선봉지역에 통신센터 건립을 재추진하기로 했다. 남포공단 합영사업을 진행하던 대우도 1997년 김우중 회장 방북 시 논의했던 사업들을 재검토했다. LG도 통신·에너지·자원개발·수산물 가공 등 신규 사업 검토에 들어갔다. 롯데, 코오롱, 고합, 국제상사, 에이스침대, 삼천리자전거, 태창,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등도 경협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8년 6월16일,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끌고 간 500마리의 소떼를 실은 트럭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북한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현대그룹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정부가 경협 관련 조치들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방북을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했다. 1998년 2월2일, 북한의 대남사업 책임자인 김용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 위원장에게 베이징에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2월23일 김용순이 답신을 보내오면서 현대와 아태의 경협 대화가 급진전되었다. 2월24일부터 베이징에서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과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의 회담이 진행되었다. 여기에 4월 말 정부의 연이은 경협 활성화 조치는 날개를 달아줬다. 5월까지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며 현대와 아태의 실무진은 아산의 2차 방북과 현대의 대북 사업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현대는 실무회담에서 9년 전에 합의한 금강산 관광 및 개발 계획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북한은 “남북 관계는 특수한 관계이니 수익성 차원을 떠나서 도와주기 바란다”면서 비료 5만t, 비닐 1억㎡, 디젤유 5만t, 납사 2만t의 지원과 김책제철소, 선박조선소, 전자공업, 탄광·광산설비, 비료공장, 임가공사업 등의 현대화를 요구했다.
 
실무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아산은 ‘소떼방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2월 이후 석 달간 실무진들이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며 회담을 가졌지만 아산의 방북이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아산이 첫 방북 때의 경로(도쿄→베이징→평양)와 달리, 2차 방북 때에는 “판문점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사실 아산은 이미 첫 방북 때 “군사분계선의 통과가 없는 금강산 공동 개발 작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9년 후, 열여덟 살이던 1933년에 부친이 소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던 그는 적대적 분단을 넘어 남북 평화의 시대를 여는 상징적 이벤트로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가는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다. (누렁)소는 한국인들에게 민적 동질감을 일깨워주는 상징적 존재였다. 결국 아산의 ‘고집’은 관철되었다. 현실적으로 판문점을 통과하지 않으면 소 500마리를 한꺼번에 이동시킬 수도 없었다.
 
1998년 6월16일, 아산은 ‘세기의 목동’이 되어 소떼를 이끌고 철책과 지뢰로 가득한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넘었다. 소떼방북은 판문점이 남북을 갈라놓는 자리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줬다. 경협 추진의 ‘승부수’였던 이 세기적 이벤트는 현대의 업종적 특성과 함께 대북 사업의 선점 효과를 과시할 수 있었다.
 
방북한 아산 일행은 7박 8일 동안 소 500마리 인계, 경협 협의, 고향 방문 등의 일정을 보냈다. 김용순, 정운업(민경련 회장) 등과 경협에 대해 합의한 결과 양측은 ①금강산 관광 개발 원칙에 관한 의정서 ②금강산 관광 개발추진위원회 설립에 관한 합의서 ③금강산 관광을 위한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①승용차 및 화물자동차 조립 공장 건설·수출 ②자동차 라디오 20만대 조립 ③20만t 규모의 고선박 해체 설비 및 7만t 규모의 압연강재 생산 공장 건설 ④제3국 건설 대상에 대한 공동 진출 검토·연구 ⑤공업단지 조성 ⑥통신사업 검토·연구 등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이때 합의한 내용은 그의 첫 방북 때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가 1983년 실리적 북한 접근을 주창한 이래 북한의 저임금·값싼 지하자원·낮은 물류비·관광 특수 등에 주목하고 냉전 해체의 상황을 자신의 사업 영역 확장에 활용하고자 한 오래된 구상이 15년 만에 비로소 실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합의 내용은 당시 현대그룹 전 계열사가 대북사업 계획서를 짤 정도로 철저하게 현대의 필요에서 출발했다. 이는 경협의 업종 특성을 반영한다. 즉 아산은 자본의 생산력 저하라는 위기 앞에서 냉전해체라는 시대적 조건을 자신의 기업에 유리하게 활용하고자 한 철저한 실리 주의자였다.
 
신설된 ‘현대대북사업단’은 합의 내용에 따라 금강개발(금강산개발), 현대상선(유람선), 현대자동차(승용차 조립), 현대전자(자동차 라디오 조립, 통신사업),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정공(고선박 해체), 인천제철(압연강재), 현대건설(제3국 건설업 진출, 공업단지 조성) 등 계열사를 총망라했다. 이들은 베이징에서 북한과 계속 실무회담을 진행하면서 수시로 방북해 합의한 사업들을 실행에 옮겼다.
 
1998년 11월18일 오후 5시30분, 실향민과 관광객 승무원 등 1355명을 태운 금강산 첫 관광선 '현대 금강호'가 동해항에서 출항하고 있다. 사진/현대그룹
 
10여 년 만에 재개된 경협 논의의 첫 출발점은 역시 금강산 관광이었다. 1998년 6월23일 방북에서 돌아온 아산은 “올 가을부터 매일 1000명 이상씩 금강산 여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정몽헌도 현대 본사에서 기자들에게 가능하면 9월 중에 금강산 유람선 관광을 시작하고 연 30만 명 이상 유치할 계획이며, 육로나 철로가 뚫리면 자동차와 기차로 금강산을 오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아산의 북방경제권 구상에서 소련과의 경협이 목재 등 자원개발에서 시작되었다면, 남북경협의 출발점은 관광이었다. 물론 관광업은 현대에 친근하지 않은 업종이었다. 그러나 아산에게 금강산 관광은 단순한 관광 사업이 아니었다. 경협을 통해 수익을 얻으려면 남북 관계가 안정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평화산업인 관광 사업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9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되었다. 아산이 소떼방북에서 돌아오기 전날 1998년 6월22일 속초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정 1척이 그물에 걸려 예인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일 후 7월12일에는 동해시 해변가에서 무장간첩 시체 1구가 발견되었다. 정부는 “북한의 사과가 있어야 현대의 2차 소 지원과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와중에 8월31일에는 북한이 ‘광명성 1호’를 발사해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결국 금강산으로 가는 첫 배를 9월25일에 띄우겠다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계속 악재가 터지자 아산은 1998년 10월27일, 다시 소 501마리와 현대 승용차 20대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다. 그리고 북측에 경협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핵심 고리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을 강하게 요구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불거지는 경협에 대한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김정일의 사업 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하자 북측으로부터 김정일이 지방 출장 중이라는, 사실상 면담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냥 돌아가겠다”는 아산의 뚝심에 마침내 10월30일 밤 아산이 머물던 백화원 초대소를 방문한 김정일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 면담을 통해 아산은 김정일로부터 금강산 일대 8개 지구의 독점개발권 및 사업권을 확실하게 보장받았다. 아산은 자신의 사후에도 현대그룹이 통일 한반도 개발의 반석을 마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대북투자 독점권을 확고히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몽헌도 금강산 개발과 현대가 북한에 주기로 한 ‘대가’를 두고 “선투자 성격이 강하며, 보험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 결과, 1998년 11월18일 마침내 금강산 관광선의 첫 출항이 이뤄졌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철벽과도 같던 분계선을 오가는, ‘꿈 같은’ 일이 실현된 것이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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