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백혈병 항소심도 산재 인정..몰아치는 공세
2014-08-21 18:46:50 2014-08-21 18:51:10
[뉴스토마토 정기종기자] 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 이숙영씨의 산업재해 인과관계를 거듭 인정함에 따라 향후 삼성전자와의 협상에서 피해자 유족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서울고등법원 행정9부는 21일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근로자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와 이숙영씨의 유족 등 5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청구소송의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은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유족들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반올림은 판결 직후 성명을 통해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결”이라며 “산업재해가 인정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산업재해 인정의 길이 열리길 바란다”는 입장을 내놨다. 동시에 판결을 근거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고통을 준 삼성전자와 근로복지공단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삼성전자 서울 서초사옥(사진=뉴스토마토)
 
◇산재 신청 7년3개월만의 결실..반올림 “나머지 피해자 위해 노력할 것”
 
이날 법원이 1심에 이어 또 다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기까지 무려 7년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황유미씨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겪은 그간의 고통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졌다. 황상기씨는 지난 2007년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피해자인 근로자 측이 산재 입증의 책임을 져야 하는 현행 법 제도 하에서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싸움을 이어나가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에 반올림은 삼성전자의 반박과 근로복지공단의 안일한 판단이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배가시켰다고 주장했다.
 
반올림은 “삼성전자의 정보 은폐와 사실 왜곡에 근로복지공단의 철저하지 않은 재해 노동자 업무환경에 대한 조사가 더해지며 이토록 오랜시간이 걸렸다”며 “근로복지공단은 오늘 판결에 다시 상고함으로써 유족들의 고통이 더 길어지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신속한 보상을 중요시해야 하는 근로복지공단이 이에 반해 원심의 산재 인정 판결에 항소하는 바람에 긴 시간이 걸렸는데, 또 다시 상고를 한다면 근로복지공단 스스로 법을 무시하고 기업주를 위한 기관임을 선언하는 것”이라며 상고 움직임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삼성은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승소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하며, 근로복지공단 역시 지난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이번 판결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날 승소한 2명의 피해자와 함께 재판을 받아온 나머지 피해자 고(故) 황민웅씨와 현재 투병 중인 김은경, 송창호씨 등 3명에 대해서는 근무환경과 발병의 인과관계 증명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올림은 이에 대해 “오늘 산재 불승인 판단을 받은 3명의 노동자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의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었어야 했다”며 “노동자에게 증명 책임이 있는 현행 법 제도는 당장 개선되어야 하며, 이들이 직업병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황상기씨를 비롯한 반올림 관계자들이 '일부 피해자 우선 보상 방안'을 반대하는 기자회견 중인 모습.(사진=뉴스토마토)
 
◇삼성 “판결 존중”..협상 실타래는?
 
삼성전자는 법원의 판결 직후 결과를 존중한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삼성전자는 “회사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이미 아픔을 겪은 가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 예방노력을 약속한 만큼 협상을 통해 조속히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현재 진행 중인 삼성전자와 반올림 간 협상의 주도권이 일정 부분 반올림 측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게 양측의 공통된 견해다. 양측은 지난 5월28일 첫 대면을 시작으로 2주에 한 차례씩 협상을 진행했지만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대책 등 현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삼성전자의 전향적인 태도로 급속도로 해결될 것 같던 백혈병 피해자 문제가 또 다시 복잡하게 얽히는 순간이었다. 삼성전자는 권오현 대표이사(부회장)가 직접 나서 사과를 하는 등 수차례 사과를 한 만큼 보상과 재발방지 대책 수순으로 넘어가길 원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가 백혈병 피해가 인정되는 8명의 피해자에 대해 우선보상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문제는 한층 복잡해졌다. 피해자 가족들 간 이견이 생기면서 협상 반대편에 있는 반올림의 격한 반응도 제기됐다.
 
 
협상단 대표 황상기씨는 지난 18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삼성전자가 200명이 넘는 피해자를 두고 8명에게만 우선적으로 보상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추후에 논의하자고만 하고 있다”며 “결국 나중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보상 문제를 거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올림은 이와 함께 삼성전자 반도체·LCD 부문에서 일하다 백혈병, 뇌종양 등 중증질환에 걸렸다는 제보자만 164명에 달하며, 그중 7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삼성전자 측도 곧바로 "사실과 다른 주장에 유감스럽다"고 대응하며 분위기는 한층 싸늘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법원이 항소심에서도 산재를 인정하는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자 삼성전자의 당혹감은 한층 커졌다. 비록 양측의 협상이 '판결과 교섭은 별도'라는 기조 속에 그간 교섭장에서 판결 결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향후 삼성전자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단초는 마련됐다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피해자 측 변호를 맡고 있는 임자운 변호사는 “그동안 삼성 측이 피해자들의 발병과 근무환경의 인과관계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법 판결까지 나온 만큼 협상자리에서 확연한 태도 변화는 없을지라도 내부적인 태도의 변화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피해자 문제는 지난 2005년 6월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 직원인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후 9년간 논란이 지속됐다. 2년 뒤 황유미씨가 끝내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반올림)이 발족됐고, 피해자 보상문제를 두고 양측은 끊임없이 대립해 왔다.
 
무려 9년 동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삼성 백혈병 논란은 삼성이 지난 5월14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그동안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사망했거나 난치병에 걸린 직원들과 피해자 가족에 대한 공식사과와 함께 적절한 피해 보상을 약속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한편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6차교섭은 다음달 3일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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