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금융기관 이사회 '정부 일변도'
(11개 정책금융기관 비교검증)(6)지배구조 선진화(G)(상)
기관장이 이사회 의장 '독식'…"공운법·기관법 탓"
1960년대·서울대·남성이 장악…다양성 확보 결여
2024-09-09 06:00:00 2024-09-09 09:06:06
[뉴스토마토 임지윤 기자] 지배구조는 기업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주와 이사회, 경영진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견제와 균형' 이라는 원리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기업은 존속할 수 있습니다. 한해 200조원이 넘는 막대한 자금을 집행하는 정책금융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투명하고 공정한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경영할 때 '국리민복·국민경제·균형발전' 등 공익적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가 평가대상으로 삼는 11개 정책금융기관의 이사회 등 지배구조를 독립성과 다양성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도해야 할 국내 정책금융기관들의 기관장에게 지나친 권한과 권력이 쏠려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공공기관 기관장이 이사회 의장까지 겸직하며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기관장은 1960년대생·서울대·행정고시를 통과한 재경직 출신·남성이었습니다. 
 
6일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가 평가대상으로 삼는 11개 기관의 기관장과 이사회 의장을 분석한 결과 유일하게 주택도시보시보증공사(HUG)만 이사회 의장과 기관장이 분리돼 있었고, 나머지 10개 기관장은 이사회 의장까지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한국벤처투자는 지난해 11월 유웅환 전 대표 사임 뒤 신상한 부대표가 대표이사 직무대행으로 10개월째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무용지물' 전락한 공운법…대부분 기관장이 '이사회 장악'
 
(그래픽=뉴스토마토)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이사회 의장을 겸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이 있습니다. 공운법 제18조 2항에는 시장형 공기업과 자산규모가 2조원 이상인 준시장형 공기업의 이사회 의장은 제21조에 따라 비상임이사가 맡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제18조 4항에서는 자산규모가 2조원 미만인 준시장형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의 이사회 의장은 기관장이 된다고 기재돼 있습니다. 공운법은 지난 2007년 정부가 공공기관 이사회의 독립성과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법률이지만, 규모와 기관 성격에 따라 이사회 의장 겸직 유무가 달라집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이 4조5536억원으로, 자산 2조원이 넘는 준시장형 공기업에 해당하는 HUG만 유일하게 공운법 제18조 2항을 적용받고 있습니다. HUG 이사회는 유병태 사장이 아닌 심오택 선임비상임이사가 맡고 있습니다. HUG를 뺀 나머지 10개 기관들은 공운법에서 해당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으면서 '기관장이 이사회를 소집하고 의장이 된다'고 명시된 설립 근거법 또는 정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한국벤처투자 등 4곳은 '기타공공기관'으로 분류되며 한국무역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5곳은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으로 묶여 공운법에서 기관장의 이사회 의장 겸직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려면 공운법뿐 아니라 기관 설립법까지 손을 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민간 기관으로 분류돼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을 따르는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도 대표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성장금융 관계자는 "민간 기관과 유사한 사유로 당사의 원만한 이사회 소집과 효율적인 이사회 운용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권마다 반복되는 낙하산 인사 논란
 
기관장이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책금융기관 낙하산 인사 논란은 윤석열정부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2016~2017년 박근혜정부에서 경제수석을 맡았던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제 20대 대통령중앙선거대책본부 후보 정무실장으로 정책 자문 역할을 수행하다 윤 대통령 당선 뒤 3개월 만에 산업은행 회장직에 올랐습니다.
 
강석진 중진공 이사장과 기업은행의 이근경·전현배 사외이사 및 전병목 상임감사, 신용보증기금의 권택기·최유미 비상임이사, 주현철 성장금융투자운용 사외이사도 현 정부와 인연이 있는 낙하산 인사로 거론됩니다. 올해 3월과 7월, 천청호 전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과 차순오 전 대통령실 정무1비서관은 각각 기술보증기금 상임이사와 수출입은행 상임감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HUG에서 감사 역할을 맡고 있는 홍지만 상임이사도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정무1비서관을 역임하다 2022년 대통령의 인적쇄신과 함께 사실상 경질됐다가 지난해 HUG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임원이 제 역할을 하는지 감시·견제하기 위한 장치로 사기업의 사외이사와 같은 '비상임이사제도'가 존재하지만, 이 역시 유명무실한 상황입니다. 한국수출입은행의 개별 비상임이사 활동 내역을 보면 이재민·윤태호·허장·남혜정 비상임이사 중 올해 1월부터 이달까지 16개 안건 중 반대의사는 없었습니다. HUG는 지난해 19차례 이사회에 올라온 77개 안건 중 단순 보고 13개를 뺀 63개 안건 전부가 원안 그대로 통과됐습니다. 상장사인 기업은행 역시 올해 1~6월 실시된 27건 의안에 대해 사외이사들은 의견은 김성태 행장과 100% 일치했습니다.
 
다양성 결여…여성 임원 5년간 '0'명 기관도
 
(그래픽=뉴스토마토)
 
획일화된 임원 구성도 문제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춰 폭넓은 관점을 갖추고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해 임원들의 나이·학력·성별 등의 다양성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11개 기관의 임원 현황을 살펴보니, 여전히 1960년대생·서울대·행정고시를 통과한 재경직 출신·남성에 편중돼 있었습니다. 특히 11개 정책금융기관 가운데 기관장이 여성인 곳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공운법 제24조의2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임원 임명 목표를 수립해야 한다'고 적시돼 있습니다.   
 
산업은행의 경우 전체 임직원 중 여성 비율이 36.62%(2분기 기준)에 육박했지만, 경영진 중 여성은 없었습니다. 강석훈 회장을 비롯해 전무이사, 감사, 사외이사, 부문장, 준법감시인 등 18명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무역보험공사도 본부장급 포함 14명 경영진 모두 남성입니다. 산업은행은 2019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여성 임원(등기임원 기준)을 임명한 적이 없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지난 2019년 '공기업·준정부기관의 경영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고 2020년부터 여성 임원이 최소 1인 이상이 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산업은행은 기타공공기관에 해당돼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됩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공운법에 따르면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노동이사제'도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만 해당됩니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한국벤처투자 등 기타공공기관은 적용받지 않고 있습니다. 중진공은 김민애 비상임이사를 노동이사 겸 여성임원으로 두고 있으나 자회사인 한국벤처투자는 노동이사도 여성 임원도 없었습니다. 금융산업노동조합 공공정책본부 관계자는 "노동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한 공운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기획재정부에 의해 기타공공기관이 시행령에서 제외되고 말았다"며 "공공기관의 실질적 주인은 국민이기에 지배구조 민주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산업은행 노조 관계자는 "산은 전체 임직원 중 여성 비율이 40% 가까이 되는데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는 현 상황은 문제"라며 "사측과 노사협의회를 진행할 때 노조에서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임산부·육아 지원을 늘리자는 안건을 제시해도 사 측에서 대부분 수용하지 않고 있는데, 여성 임원이 있었다면 좀 더 전향적으로 검토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짚었습니다. 이어 "산은은 항상 정부에서 낙하산 회장을 임명하고,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정부의 꼭두각시처럼 일을 한다"며 "현 정권에서 제대로 된 검토 없이 대통령 말 한마디로 지방이전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 노동자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노동이사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본다"고 덧붙였습니다.
 
부분적으로 이사회 구성원의 다양성 제고를 위한 노력은 감지됩니다.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산업은행과 같이 기타공공기관에 속함에도 각각 여성 비상임이사 1명씩 두고 있습니다. 수출입은행의 경우, 노동조합 추천 이사제를 시범적으로 도입해 운영 중입니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은 각각 여성 임원이 2명씩 있습니다.
 
"공공기관 효율성 명목…관치행정 반복"
 
전문가들은 ESG 경영을 선도해야 할 공공기관에서 공운법을 이유로 이사회 독립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비판합니다. 이사회 독립성을 제고하기 위해 공운법과 설립법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옵니다. 채진원 경희대학교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의사결정과 집행, 감사라는 게 삼권 분립인데 집행을 책임지는 기관장이 의사결정을 주관하는 이사장까지 겸직한다는 것은 권력 독점 현상이 있을 수 있어 합리적 결정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꼬집었습니다. 이어 "시민사회나 민간기업에서도 권력 분립을 하고 있는 추세인데 공공기관이 효율성이란 명목 아래 권력 분립을 하지 않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이라며 "이러다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공기관장 자리에 비전문가를 보은 성격으로 내리꽂는 '낙하산 인사', 관치행정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황용식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이사회 독립성은 모든 조직이나 기관에 적용돼야 하는 것"이라며 "공운법과 설립법 등에 대한 전체적인 정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이동섭 한국거버넌스포럼 사무국장은 "정책금융기관의 경우, 상당수가 정부가 대주주이기에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들보다 수직적·관료적 문화가 심한 것 같다"며 "미국 등 다른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도 견제와 균형 원리 아래 CEO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김동수 김앤장 ESG경영연구소 소장은 "연령, 학교, 성별 등 배경이 비슷하면 중요한 경영 판단에 있어 의견을 함께할 경향이 크다"며 "이사회의 중요 역할 중 하나가 경영을 함에 있어서 부닥칠 위험 가능성을 줄여나가는 것인데, 이러한 측면에서 이사회 구성원의 다양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재호 K-정책금융연구소장은 CEO가 이사회 의장을 맡도록 한 설립근거법과 함께 나아가 공운법(18조2항)도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 소장은 "G는 기업운영의 투명성, 공정성,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과 절차를 말하는데 한국의 정책금융기관들은 이사회 독립성과 다양성, 성별 차별금지, 부패방지가 주요 숙제로 제기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자산규모가 큰 공기업일수록 투명성, 객관성 문제가 개입될 공산이 커, 먼저 11개 기관 설립근거법의 이사회 관련 조항을 전면적으로 손봐야 한다. 매우 낡고 늙은 조항이므로 빠른 시일 내에 법안 개정안이 발의돼야 한다"며 "공운법 18조 2항도 개정하는 것이 G의 구현을 위해 옳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지윤 기자 dlawldbs20@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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