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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2018-05-03 06:00:00 2018-05-03 06:00:00
이강윤 칼럼니스트
지난 1일부터 남북한이 DMZ 내 확성기 시설 동시 철거를 시작한 데 이어, 5일부터는 그동안 30분 차이가 났던 북한과 우리의 표준시가 통일된다. 3년 전 주체성을 이유로 표준시를 바꿨던 북한이 남북단일표준시로 복귀하는 것이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후속 조치들이 즉각 이행되고 있다. 회담 이후 대부분의 언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낭만적 희망을 전하고 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형과 고모부를 살해한) 폭력적이고 모험적인 애송이”로 기술했던 것에 비하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4월27일 김 위원장의 판문점 12시간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편향되고 조작된 ‘김정은 이미지’에 매몰돼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생각보다 담대하고 개방적”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그 ‘생각보다’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생각은 과연 믿을만하고 온당했는가. 냉철히 반성해야 한다.
 
김 위원장은 회담에서 “잃어버린 지난 10년을 회복하자, 다시는 단절이 없도록 하자. 그래야 오늘 이렇게 만나는 게 실효적 의미를 얻는다”고 강조했다. 그 10년은 물론 이명박-박근혜정부 10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베를린선언’과 8·15경축사 등을 통해 남북대화에 대한 우리의 진정성을 일관되게 표명했고, 김 위원장은 올 신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로부터 100여일 뒤, 4·27회담에 이르렀다. 역시 중요한 것은 신뢰와 상호인정이었다. 문 대통령은 회담 전부터 판문점 선언에 대해 국회 동의를 받겠다고 했다. 향후 국내정치에 어떤 변화가 생기더라도 4·27선언만큼은 무력화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분명한 역사적 전기로 만들겠다는 천명이다. 자유한국당의 훼방이 예견됨에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의미가 매우 크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합의때마다 지금 못잖게 흥분과 기대가 컸지만, 여러 사정으로 무력화되어가는 것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당이 ‘완전한 비핵화-종전선언’을 반대한다면, 어느 나라 정당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북한은 예전의 북한이 아니라는 걸 여러 군데서 포착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그의 선대 때와는 다른 방식의 국가운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밥(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 김일성주석 시대의 슬로건이었다면, 김정은 시대는 ‘마식령스키장에서 스키를 타고 과학자거리 고층아파트에 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 마디로 “인민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북한을 통해 바로 백두산에 가고 싶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도로 사정이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다. 머잖아 준비하겠다”고 했다. 자신들의 부족한 면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2017년 신년사에서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해를 보냈다”고 밝혔다. 대단한 자기반성이자 고백이다. ‘수령의 시대’ 동안 김일성-김정일수령은 신과 같은 무오류적 존재였다. 그런데 최고지도자가 자신의 능력부족을 언급했다. 북한의 변화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웅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 4·27선언은 전쟁 위기에서 만들어진 결정적 전기일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고 본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말고는 화면 속 두 사람이 어쩌다 움직이는, 거의 정지모션 같은 화면 30분에 세계는 이목을 집중했다. 영화건 방송이건 이같이 드라마틱한 장면이 이전에 있었을까, 앞으로도 있을까. 궁금함이 초집중된 그 ‘침묵의 30분’은 남-북한이, 아니 한반도 전체 민중이 세계를 향해 보내는 강력한 모르스 부호였다. 앞으로 어마어마한 속도와 강도로, 김 위원장 표현을 빌자면 “만리마 속도”로 변화가 예상된다. 이럴때일수록 희망을 갖되 차분함을 유지하면서 최종적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 즉 평화와 공동번영, 나아가서 군축과 통일에 이르기까지 항상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던 신동엽 시인이 어느 날 술을 제법 마셨던 모양이다. 이런 시를 썼다. “(전략) 총부리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눈 깜박할 사이 물방개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버리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치열하게 살다 간 어느 시인의 50년 전 꿈을 허망하게 놔두지 말자.
 
이강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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