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아북극의 섬, 돌미궁과 거석 ‘세이드’를 찾아서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19)
2024-04-08 06:00:00 2024-04-08 06:00:00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볼쇼이자야츠키섬의 신비한 풍경
 
솔로베츠키 제도는 천혜의 자연 풍광을 자랑한다. 여름철 벨루가곶(케이프 벨루지)을 찾는 흰고래들이 삼삼오오 헤엄치고 바위 해안에는 물범들이 햇빛을 쬐고 있다. 솔롭키의 중심인 볼쇼이솔로베츠키 또는 간단히 솔로베츠키섬은 침엽수림과 호수들, 각종 풀과 꽃, 베리류 열매로 덮여 있고 백야의 땅에는 자정 무렵의 석양이 두어 시간 후 여명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자연이 아닌 인간이 남긴 흔적으로 솔롭키에서 가장 신비한 풍경은 아마도 볼쇼이자야츠키섬의 돌로 된 미궁(迷宮)일 것이다. 볼쇼이자야츠키섬은 솔로베츠키 제도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섬들 중 네 번째로 큰 섬에 해당되지만, ‘크다’는 뜻의 ‘볼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과는 달리 실상 그 크기는 1.25km2 정도다. 섬의 이름은 ‘토끼(자야츠)’를 뜻하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이 섬에 토끼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러시아어로 ‘바다토끼’라 불리는 북극해의 턱수염물범 사냥이 이 지역에서 발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대표적이다.
 
백야 시기에는 자정 무렵의 석양과 새벽 2-3시경의 여명이 어우러져 볼쇼이솔로베츠키섬을 그림으로 만든다. 사진=박성현
 
새벽 2시경 여명과 어우러진 솔로베츠키 수도원 전경. 사진=박성현
 
볼쇼이자야츠키섬은 솔로베츠키섬에서 5km가량 떨어져 있는데 보호구역이라 가이드가 있는 그룹투어를 신청해 방문하게 돼 있다. 배로 40분쯤 걸려 도착하니 바람이 많이 불고 곳곳에 돌이 가득하다. 배를 대는 부두도 돌로 돼 있다. 이 섬은 솔로베츠키섬과는 매우 다른 풍경으로 호수, 늪, 경작지가 없고 섬 전체에 돌과 바위가 흩어져 있다. 한때 2~3개의 호수가 있었지만 이후 이탄(泥炭)으로 덮였고 지금은 움푹한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바위땅에 풀과 이끼, 지의류가 자라는 풍경이―진짜 툰드라는 아니지만―극지방의 툰드라와 흡사하다. 관목과 희귀한 저지대 나무도 보인다. 섬에서 이동할 때는 식물이 손상되지 않게 나무데크길로만 움직여야 한다. “조심하세요! 한번 밟히면 복원되는데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립니다.” 안내자가 방문객들에게 주의를 준다.
 
볼쇼이자야츠키섬의 석조부두에서 바라본 전경. 왼쪽부터 수도원 역사의 산물인 석실, 조리실, 성 안드레아 목조교회가 보인다. 사진=박성현
 
이 섬에도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역사가 서려 있다. 16세기 중반 필리프 수도원장은 수도원으로 여행하는 상인과 순례자들을 위해 볼쇼이자야츠키섬에 석조항구와 석실, 조리실을 건설했고 섬은 항해자들이 백해의 폭풍을 피해가는 피난처가 됐다. 그 후 이곳은 교회를 비롯해 더 많은 건물들로 구성된 성 안드레아 스케테(skete)가 된다. 스케테는 수도원의 한 유형으로 한적한 곳에 위치한 은수자(隱修者)들의 수도생활공동체를 가리킨다. 배에서 내리면 석조부두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맞은편 건물이 이 스케테의 중심인 성 안드레아 목조교회다. 이 교회의 시초는 1672~1676년 차르 군대에 의해 솔로베츠키 수도원 근처에 세워졌던 작은 목조예배당인데 1691년 볼쇼이자야츠키섬으로 옮겨졌다. 1702년 표트르 1세가 솔롭키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이 섬에 들러 예배당을 교회로 재건하고 사도인 성 안드레아의 이름으로 봉헌했다고 전해진다. 성 안드레아는 러시아 해군함대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20세기 들어 솔로베츠키 제도에 수용소가 있던 시절에는 볼쇼이자야츠키섬에 여성 죄수들을 격리하는 감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현재 이 섬에는 스케테의 남아 있는 몇 건물을 볼 수 있는데, 석조항구의 부두와 조리실, 석실, 현대에 복원된 성 안드레아 목조교회와 19세기 건물인 지하저장실이 그것이다.
 
돌미궁의 수수께끼
 
볼쇼이자야츠키섬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에는 강력한 빙하가 남긴 빙퇴석 유적인 솝카산이 있는데 초목이 거의 없고 돌만 쌓여 있는 언덕이다. 솝카에서 약 1km 떨어진 해안 근처, 즉 섬의 서쪽에는 시그날나야산이 있다. 산이라 불리지만 솝카처럼 나지막하고 식물은 거의 없으며 바위로 빽빽한데, 산의 능선을 따라 빙퇴석 능선이 보인다. 바로 이곳에 돌로 된 미궁들이 모여 있다. 반면 솝카에는 미궁이 없다. 미궁(labyrinth)과 미로(maze)는 혼용되기도 하지만, 미로는 갈림길이 있는 반면 미궁은 갈림길 없이 입구와 출구가 하나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미궁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북유럽 국가들과 북부 러시아에 총 500개 이상이 존재한다. 북부 러시아의 미궁 약 50개 중 30여 개가 솔로베츠키 제도에서 발견됐고 그중 13~14개가 바로 볼쇼이자야츠키섬에 있다. 솔롭키 외에도 카렐리야와 콜라반도에서 미궁이 발견된다. 
 
볼쇼이자야츠키섬은 바위가 많고 툰드라와 유사한 풍경을 띤다. 식물보호를 위해 섬 안에서는 나무데크길로만 이동해야 한다. 사진=박성현
 
미궁 외에도 볼쇼이(큰) 자야츠키섬과 말리(작은) 자야츠키섬에는 약 900개의 돌무더기가 있다. 돌무더기들을 발굴할 당시 일부 더미에서 석영 폐기물, 해양동물과 새, 물고기의 불탄 뼈, 작은 석탄 등이 나와 돌무덤 같이 장례나 희생 제의에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었지만 확실한 연대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원형 또는 타원형인 돌무더기들의 나이는 기원전 1,000년에서 19세기까지 다양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솔로베츠키 제도에는 상이한 시대와 목적을 지닌 총 1,200개 이상의 돌무더기가 기록돼 있다. 미궁 역시 오랫동안 연구돼 왔음에도 연대 추정이 어려운데,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가장 오래된 미궁을 기원전 1,000년경으로, 마지막 미궁을 솔로베츠키 수도원이 설립되고 수도사들이 오기 전인 14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한다.
 
돌로 된 미궁들이 모여 있는 시그날나야산. 돌과 바위로 가득한 빙퇴석 능선을 볼 수 있다. 사진=박성현
 
볼쇼이자야츠키섬의 돌미궁. 많이 자란 풀에 뒤덮여 미궁의 형체가 선명히 보이지는 않는다. 사진=박성현
 
미궁은 일반적으로 나선형 돌 배치인데 고고학자 쿠라토프(A. Kuratov)는 솔롭키 미궁의 모양을 둥근 나선형, 말굽 모양의 단순형, 고전적인 나선형, 이중나선형, 동심원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미궁들은 무엇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 백해 암각화를 제작한 집단과 미궁을 만든 집단 사이에는 혹시 연관이 있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미궁의 목적에 대해 크게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 번째는 고대의 의식과 연결시킨 것인데, 장례의식이나 특정한 제의, 죽은 자의 숭배 또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연결하는 길로 미궁을 이해한다. 미궁의 중앙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뱀의 머리를 닮아 지하세계를 지키는 뱀에 비유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낚시용 덫으로 해석한 것인데, 밀물 때 밀려온 물고기들이 미궁에 갇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면 포획하기 위한 함정으로 보았다. 혹은 천문 달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여러 해석들이 시도돼 왔지만 각 해석마다 논거가 충분치 못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직까지 고대의 돌미궁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지점이 여럿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의 미궁 ‘라비린토스’가 우연히 나온 이야기가 아닐 것이고,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의 요지를 210자 게송으로 축약해 『화엄일승법계도』를 만들었을 때 미궁 형태의 그림을 사용한 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통하는 것일까?
 
볼쇼이자야츠키섬의 돌무더기들. 사진=박성현
 
‘라플란드의 날아다니는 돌’ 세이드, 사미족의 영혼을 담다
 
돌미궁 외에 솔롭키 방문을 통해 꼭 봐야겠다고 목적한 것이 거석 ‘세이드’였다. 세이드는 거대한 바위가 작은 돌(종종 세 개) 위에 서 있는 구조물로 거석 유형 중 하나로 분류된다. 세이드는 북방의 토착유목민인 사미족에 의해 신성한 존재로 숭배돼 왔다. 사미족은 북극과 가까운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지역과 러시아 콜라반도에 사는데 그들이 사는 지역을 ‘사프미’라 한다. 예전에는 외지인들이 그들을 ‘라프’라 칭하고 그들의 지역을 ‘라플란드’라 불렀다. 사미족의 사고에 따르면 세이드는 일종의 집이자 주변 지역을 감시하는 영혼의 서식지다. 영혼은 그 장소에서 기분이 좋은 한 머물면서 사람들을 돕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처럼 집과 함께 날아갈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미족이 세이드를 ‘날아다니는 돌’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사미족의 세이드 숭배와 관련된 전설을 하나 살펴보면,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은 자기 영혼의 일부를 돌인 세이드에 남겨 두었는데 이는 자신이 죽더라도 괴물이 잡아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네메츠키쿠조프섬 정상에 있는 세이드와 그 너머의 백해. 거대한 바위가 작은 돌들 위에 서 있다. 사진=박성현
 
네메츠키쿠조프섬 정상에서 내려다본 백해와 쿠조바 군도의 모습. 사진=박성현
 
세이드를 보려면 쿠조바 군도로 가야 하는데 솔로베츠키섬에서 30km가량 떨어져 있고 이동에만 약 2시간이 걸려 투어가 수시로 있지는 않았다. 솔롭키와 켐 사이에 위치한 쿠조바 군도는 카렐리야공화국에 속한다. 16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중 루스키(러시아) 쿠조프섬과 네메츠키(독일) 쿠조프섬이 가장 크다. 세이드가 있는 곳은 무인도인 네메츠키쿠조프섬으로 이곳에 약 150개가 있다. 이 섬은 높이가 118m여서 꼭대기까지 작은 등반을 하게 된다. ‘쿠조바’라는 이름도 ‘가문비 머리(또는 봉우리)’라는 뜻의 사미어 ‘쿠즈-오이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세이드는 백해의 섬과 해안, 카렐리야, 콜라반도,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발견되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고 다만 빙하와 관련돼 있다는 설이 수용되는 편이다. 섬을 한참 오르니 세찬 바람 속에 거대한 바위들과 푸른 백해가 펼쳐져 있다!
 
네메츠키쿠조프섬의 해안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권순욱 미디어토마토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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