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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규

(자본시장 이야기)회계 관행에서 엿본 아픈 근현대사

2019-04-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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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초 서울의 한 행사에서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한국은 불신 사회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오랜 시간 군대 문화가 사회를 지배한 영향이 크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대학을 다닐 때 한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강의 내용입니다. 과목명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사회문화론 수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수업은 한국은 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와 같이 개인의 철학과 역량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시험 대신 정해진 답을 잘 찾는 수능시험으로 대학 신입생을 선발해야 하고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져야 할까. 취업할 때 이력서에 가족의 직업까지 상세하게 적고 업무와 무관한 각종 서류를 제출해야 하나. 같은 질문을 통해서 한국의 사회문화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으로 진행됐습니다.

결론은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인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낮고 그 원인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 쿠데타와 군부 독재 등으로 이웃과 친인척은 물론이고 심하면 가족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불안감이 기저에 깔렸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채점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니 누가 봐도 정답인 시험을 치러야 하고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최대한 많은 사적 정보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는 소위 '앞잡이'라고 불리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이 독립운동가 색출에 앞장섰고 때로는 성과를 내기 위해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했습니다. 이웃끼리 서로를 감시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는 자고 나면 주둔군이 바뀌던 때였고 그에 따라 땟거리를 위해 했던 일로 이적행위자 내지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흔했습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고인이 된 배우 이은주가 총살을 당한게 이 같은 사례에 해당합니다. '빨갱이'가 절대 악이었던 군사정권 시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명령에 대한 복종과 불복, 아군과 적군이란 이분법만 존재하는 군대문화는 이 모든 시기를 관통합니다. 극소수의 권력자내지 명령권자 외에 대부분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것도 군대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불안감을 낮추고 생존 가능성은 높이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자의 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권력자의 말은 정답이 되고 그의 뜻에서 어긋나면 오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자신의 판단과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정답을 더 정확히 예측할 가능성이 높은 누군가에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자기 확신보다 타인에 대한 의지가 익숙해지는 것 입니다.

기업과 회계업계에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을 최근 회계 관련 심포지엄에서 알게됐습니다. 국내 상장사에 2011년부터 국제회계기준 IFRS이 전면 도입됐습니다. 기존 회계기준인 K-GAPP은 규정 중심으로 사실상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었다면 IFRS는 원칙 중심으로 상황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게 다릅니다.

IFRS를 적용하면 기업의 판단에 따라 회계 처리를 하고 그 근거를 공개하면 됩니다. 물론 원칙을 벗어나면 문제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증권선물위원회가 지난해 2월 에이프로젠에 대한 감리 후 "회사가 지정감사인의 지적을 수용해 수정공시한 사항에 대한 조치안을 심의한 결과 정정공시하기 이전의 회계 처리도 문제가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에이프로젠과 회계법인의 의견이 다르지만 둘 다 정답이란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기업과 회계법인은 특정 사안에 대해 금융감독 당국의 판단을 요구하는 질의회신에만 매달려 있다는 게 회계학자들의 지적입니다. 규정 중심의 K-GAPP을 경험하지 않은 회계사도 금융당국의 판단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기업의 경우에는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장부가 제대로 작성됐는지 감사를 하러 온 회계법인에 자문을 구하는 사례도 상당수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금융당국이란 권력자가 내놓을 정답에서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미루고 답을 내려주기만 바라는 셈입니다.

자유롭게 토론해 결론을 도출하고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정착돼야 한다는 말이 심포지엄에서 가장 가슴 깊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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