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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권일

5.18 유공자들의 용기있는 고백

2018-11-0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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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광주 여성들을 성폭행한 사건과 관련해 지난 7일 국방부장관이 사과했다. 그러나 정부의 사과로 끝날 일만은 아니다. 먼저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5.18이 일어난지 38년만에야 계엄군에게 당한 치욕적인 인권유린과 성고문 사실을 공개한 5·18 유공자 차명숙씨, 계엄군 수사관에 당한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5.18 유공자 김선옥씨의 용기있는 고백은 존중받아야 한다.  
 
먼저 차명숙씨의 사례다. 차씨의 사례는 올해 4월 30일 광주광역시의회에서 공개됐다. 차씨에 따르면, 그녀는 80년 5월 당시 학원 수강생으로 열아홉살이었다. 5월19일 계엄군에 의해 죽어가는 시민들을 보고 자진해서 가두방송을 했다.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다친 부상자들을 돌보던 차씨는 5월 23일 기관원들에게 붙잡혀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다음은 그녀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에서 수사 과정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했다. 여성에게 가해진 고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치욕적이었다. 여성들은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다.
어린 여중생, 여고생들이 잡혀왔는데, 무릎을 꿇게 한 뒤 군화발로 짓밟혔다. 상무대에 잡혀온책상위에 앉혀 놓고 물을 끼얹어 가면서 어깨가 빠지도록 몽둥이로 등을 두들겨 팼다. 살이 터져 피가 흘러 나와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5·18이 끝나고 9월16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돼 교도관들에게 끌려가 일주일간 다시 고문을 당했다. 교도관 3명이 들어와 내 등 뒤로 수갑을 채우고 곤봉을 끼워 들고 나갔다. 수사관들은 이미 정해진 7가지 항목을 정해두고 죄목이 추가되면 사형이나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으니 자신들이 하라는 대로 시인하라고 협박했다.
고문수사 후에는 자살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10월2일부터 31일까지 혁시갑(수갑을 채운 손을, 허리에 채워 둔 폭 10㎝ 두께 3㎝의 가죽 허리띠에 25㎝ 길이의 쇠사슬로 연결해 놓은 계구)을 한 채 징벌방에 보내졌다. 쇠줄에 묶인 가죽수갑을 양 손목에 찬 채 먹고 자고 볼일까지 보면서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38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기억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차 씨는 눈물을 흘리며 계엄군과 수사기관, 교도소에서 당한 인권유린 사실을 지난 4월 언론에 공개했다. 그녀가 말한 “끔찍한 고문”, “여성에게 가헤진 치욕적 고문”, “여성들은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다”는 그 말에 계엄군에 당한 성고문 사실이 폭로돼 있다. 차 씨는 당시 고문을 자행한 관련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라고 지금도 요구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당한 인권유린 사실을 공개하는 차명숙씨.사진 /뉴시스 
 
 
5.18 유공자 김선옥씨가 겪은 사례 역시 끔찍하다. 김 씨는 올해 4월, 나라를 휩쓴 ‘미투’ 에 용기를 내서 계엄군 수사관에 당한 성폭행 사실을 증언했다. 김 씨의 용기있는 고백은 올해 5월 5·18기념문화센터 주최로 열린 ‘5.18영창특별전 10방 ‘진실의 방’에 스토리로 전시되기도 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당시 ‘무너진 스물세살의 꿈’이라는 주제로 소개된 그녀의 사연이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80년 5월27일, 항쟁 마지막 날 새벽, 광주에 울려 퍼졌던 다급하고 가냘픈 목소리의 주인공이 김선옥씨다. 김씨는 올해 환갑이다. 38년 전에는 스물세살 꽃다운 대학생이었다. 80년 당시 김씨는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다. 항쟁 초기인 5월22일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도청 상황실에서 통행증을 발급해주거나 무기회수 등의 업무와 안내 방송을 하는 역할을 했다.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한 5월27일 새벽 3시. 그는 시민군 거점이던 옛 전남도청을 빠져나왔다. 항쟁의 지도부라기 보다는 사태 수습을 위해 참여한 봉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계엄당국에 의해 5.18 사태의 주모자급으로 조작됐다. 7월에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연행됐고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65일 동안이나 구금됐다. 평생 잊지못할 그 일이 일어난 것은 9월 4일이었다. 김 씨가 언론에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계엄군 수사관이 김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김씨에게 비빔밥 한 그릇을 사줬다고 했다. 김씨는 인근 여관으로 끌려가 그 수사관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차에 태워서 밖으로 나가서 밥을 먹인 뒤, 나를 끌고 여관으로 갔어요. 스물세살 나를, 그 수사관이…그 전에 죽도록 두들겨맞았던 일보다도 내가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까지 비참했어요. 자존심과 말할 수 없는 수치감….” 
 
다음날 김씨는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그 사건 이후로 삶이 산산조각이 났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씨의 엄마는 충격을 받은 뒤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도 교직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1981년 겨울에 혼자 딸을 출산했다. 그리고 5·18의 ‘5’ 자도 꺼내지 않고 숨어 살았다. 나중에 5.18 보상금으로 2000만원을 받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지금도 38년 전 5.18에 머물러 있다. “지금도 군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잘 보지 못해요.” 
 
차씨와 김씨의 사례는 계엄군이 저지른 범죄행위가 한 인간의 인생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광주광역시가 지역구인 송갑석 의원은 지난 6일 국회 예결위 회의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국가가 저지른 518 성폭행에 사건에 대해 국가가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송 의원은 “성폭행과 성 고문 등 여성인권침해 행위가 어린 여고생들과 일반 시민 대상으로 일어났다”며“이 사건은 명백한 국가 폭력이고 폭력의 가해자인 국가가 사과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낙연 총리는 “불의하게 동원된 국가 권력에 의해 삶이 짓밟힌 여성들께 깊은 사과를 드리고, 광주시민 여러분께도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정부는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치유를 위한 가능한 모든 일들을 다하겠다”고 답변했다.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치유를 위해 옛 국군광주병원 터에 국가 트라우마 치유센터를 설립하자는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지금도 고통속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트라우마센터가 조속히 설립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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