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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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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부산 가면 반짝반짝 '불광'을 내야지

2021-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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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신문 방송에서 찾아보기가 갈수록 '모래밭 바늘' 같은 세상이 되어가기에, 또 정초이기도 하니 미담 하나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부산에 토마토로 유명한 대저라는 곳이 있다. 김해시가 가까운 부산의 서쪽 끝 부산 강서구 대저동이다. 대저동 강서구청 인근엔 작은 상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 중에 '정원이발관'이 있고, 그 옆엔 한 평짜리 구두 미화 부스가 있다. 올해 예순 일곱인 이발소 주인 박경준씨와 그 보다 열 살 위인 구두미화원 문교술씨의 얘기다.
 
29년 전 어느 날 문씨가 대저동에 나타났다. 누추한 입성에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웠고, 사람들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문씨는 선천성 청각장애와 언어장애가 겹친 복합장애였다. 부인도 청각장애인이다. 그런 그가 구두를 닦겠다며 거리를 오갔지만, 사람들은 부랑아 보듯 외면하기 일쑤였다. 이발 무료봉사를 다니면서 수화를 조금 익혔던 이발사 박씨가 보기에 너무 딱해 수화로 말을 건 게 이들 29년 우정의 시작이다. 문씨와 말이 안 통하는 손님이 있으면 이발사 박씨가 나서서 '통역자'가 되어주었고, 추운 겨울 문씨가 거리에서 떨며 일하는 게 안쓰러워, 건물주 양해를 구해 이발소 옆에 간이 부스도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친구가 되어 주었다, 아니 '되어준 게' 아니라 '되었'다. 이발사 박씨의 말.
"싸우기도 엄청 싸웠다. 문씨 고집 상당하다. 괜히 오해를 사서 손님과 싸우면, 내가 문씨를 나무라고 그게 도로 우리 싸움이 된 적도 많다."
 
구두미화원 문씨의 집은 부산 시내 범일동이란 곳인데, 대저동 일터 까지 30km는 족히 되는 거리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그게 너무 위험해보여서 이발사 박씨는 한사코 말렸지만, 끝내 고집을 꺽지 않더란다. 위험한 줄 알지만 오토바이를 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터. 정부 지원금이 나온다지만, 장애인용 자동차가 어디 한 두 푼인가. 박씨는 자기 돈을 헐어 조금 더 큰 오토바이를 사줬다. 조금 더 크면 조금이라도 안전할 것 같아서. 잘은 모르지만, 이발사가 얼마나 큰 돈을 벌겠는가. 문씨는 억척과 성실로 역경을 이겨냈고, 요즘은 하루 몇 만 원 벌이는 하는, 소박하지만 어엿한 가장 노릇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수 년 전 정초, 이발사 박씨가, 서민들에게는 왠지 주눅부터 들게 하는, 문턱 높은 관청을 큰 마음 먹고 찾아갔다. 강서구청 민원봉사센터. 문씨의 구두미화 부스가 너무 낡고 황소 바람에 비도 들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였다. 고맙게도 구청 담당자는 낡은 간이부스를 흔쾌히 증축해줬다. 새롭게 단장된 일터를 보며 문씨는 "힘 닿는 대로 저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고 구청에 화답했다.
 
이발사 박씨는 "나도 셋방살이하는 주제에 뭘 크게 도와주었겠느냐. 문씨의 의지가 강했다. 작은 관심이 누군가에겐 큰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필자도 현역 기자시절 경험한 일이지만, 좋은 일 하는 사람들 열에 아홉은 대개들 이렇게 겸손하다. 박씨와 문씨의 오순도순, 투닥투닥 얘기를 듣다보니 웃음 끝에 코 끝이 찡해지고 눈가에 이슬 한 방울 맺힌다.
 
'사람 사는 세상'은 이런 게 아니겠는가. 사람 사는 세상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관된 정치 목표이자, 국정지표였다. 기득권층의 온갖 반발과 보수언론의 묻지마식 흠집내기로 결국 그는 그 꿈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많은 서민대중의 꿈이 되었다. '정치'가 못하는 일을 헐벗은 시민들이 오순도순 해내고 있다. 그들은 선택적 복지니 보편적 복지니 하는 말, 잘 알지도 못하고, 굳이 알려들지도 않는다. 복지 증세를 두고 아직도 쳇바퀴 입씨름만 벌이는 여의도 한량들과 학자입네 하는 이들의 옥신각신이 한심하다 못해 이제는 아예 관심 조차 없다.
 
글의 들머리에 "미담 하나 소개하려 함이 아니"라고 썼다. 각사 사회부 데스크가 기자들에게 취재지시 내려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면 이런 미담은 오늘 당장이라도 몇 건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야 지도부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복지 담당 공직자들에게 감히 말한다. "무능하면 정직하기라도 하라. 그것도 힘들면, 겸손이라도 하시라". 혹시 부산 갈 일 있으면 강서구청 옆 박씨 이발소에 가서 머리 자르고, 문씨 부스에 들러 구두 뒷축 갈고 반짝반짝 '불광'도 내봐야겠다.
 
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pen33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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