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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편편)이재용 부회장이 쏘아올린 큰 공
2020-05-13 06:00:00 2020-05-13 06:00:00
14일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갑자기 쓰러진 지 6년이 되는 날이다. 그동안 삼성과 한국에서는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5년 전 필자는 삼성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 위해 삼성의 궤적을 자세히 살펴봤다. 1987년 이병철 창업 회장의 작고 후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을 인수한 이후의 역사를 천착했다.
 
이건희 회장은 2014년 쓰러지기까지 특히 반도체와 가전 분야에 남다른 에너지를 투여했다. 그 결과 한국의 IT 산업 발전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김대중정부가 인터넷과 벤처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이 회장이 이끄는 삼성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당시 정부가 인터넷망 확대 등 기간인프라 확충에 힘쓸 때 삼성은 이를 하드웨어로 뒷받침했다. 그 이후 한국의 IT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바이러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 힘을 유감 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이 회장의 업적은 끊임없는 잡음과 논란 때문에 가려졌다. 주로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물려주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를 통해 이재용 부회장에게 지분을 몰아주는 등 여러 가지 수법이 동원됐다.
 
그때마다 격렬한 논란이 야기됐다. 검찰이나 사법부 또는 정치권력과의 유착문제도 늘 따라다녔다. 그런 논란은 2008년 삼성 특검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모든 사건과 논란 때문에 이 회장의 노력은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아직까지 병석에 누워있다.
 
이 회장이 쓰러진 후에도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은 계속됐다. 그 최종적 절차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었다. 합병은 객관적 타당성과 합리성을 의심받는 가운데서도 강행됐다. 그 끝은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다. 합병을 주도하거나 방조한 인물들은 수사나 재판을 받게 됐다.
 
이제 시대의 흐름은 바뀌고 시대의 감수성도 변했다. 과거와 같은 무리한 합병이나 승계가 정당화되던 시대는 역사의 저편으로 물러가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밝힌 대로 국격에 어울리는 경영과 승계를 요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다시 말해 이제 보다 선진화하고 투명한 승계방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창업자의 가문 출신이라고 무조건 경영권을 이어받는 것이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제 그 누가 챙겨주는 지분이 아니라 스스로 익힌 경영능력과 경영정신을 갖춰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6일 과거의 일에 대해 사과한 것은 경위가 어떻든 새로운 감수성에 부응하는 자세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가 자신의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한 것 역시 의미 있는 결단이라고 하겠다.
 
그의 이번 사과에 대해 구체성이 없다는 등 냉소적인 시각도 물론 엄존한다. 그렇지만 그가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 맹목적인 4세 승계를 포기한 것은 한국 경제의 앞날을 위해 길조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다른 재벌들의 머리 위로 큰 공을 쏘아 올렸다. 맹목적으로 3세 혹은 4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재벌들이 피할 수 없는 공이다. 그 공을 받아들이거나 피해야 한다.
 
사실 국내 재벌의 창업자 3세 혹은 4세들은 대기업의 경영을 맡기에는 자질미달인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폭력이나 마약 등 여러 가지 돌출행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곤 한다. 그럼에도 재벌 총수들은 이들에게 거액연봉을 주고 고속승진시키며 이른바 '경영수업'을 시킨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경영상황이 악화하고 기업체질이 허약해지곤 한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일어난 신용경색에는 바로 이런 재벌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사실 봉건왕조 시대에도 왕조가 창건된 후 3~4대까지 내려가면 대부분 허약해졌다. 창건자의 감투정신이나 비전을 갖추지도 못했고, 창건과정의 노고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태와 안일이 스며들고, 인격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기에 창건자가 아무리 고투 끝에 세운 나라라도 3~4세가 등극할 무렵부터는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곤 했다.
 
따라서 차제에 한국에서 이제 승계방정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맹목적인 3세 승계 혹은 4세 승계는 더 이상 길이 아니다. 그것은 악습일 뿐이다. 이제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지식, 합리적인 판단력과 소신을 겸비한 전문가가 대기업 경영을 이끌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정신에 어울리는 지배구조와 승계방식을 찾고 정착시켜야 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격이 요구하는 새로운 경영정신이다.
 
차기태 언론인 (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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