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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주유소습격사건'식 후보가 보고 싶다
2020-04-14 06:00:00 2020-04-14 06:00:00
이강윤 언론인
이번 총선의 사전투표율 26.69%. 유권자 4명 중 1명 넘게 사전투표에 참여했다는 얘기다. 역대 어느 대선이나 총선보다 높다. 본 투표일에는 아무래도 사람이 몰릴테니 코로나가 염려돼서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권자별 정치 성향을 떠나 '말로만 머슴'들에게 주인의 힘과 명령을 재확인시켜주려는 거 아닐까. 코로나건, 머슴 잘 고르겠다는 의지건, 최근 세 번 연속 50%대였던 총선투표율이 이번엔 60%를 웃돌 기세다. 중앙선관위 집계를 보니 사전투표율이 높았던 때는 어김없이 총투표율도 높았다.
 
사전투표장에 줄 선 분들의 표정이나 분위기에서 느낀 점 하나. 표정이나 분위기니까 물론 인상평 정도라는 걸 감안해주시면 좋겠다. 유권자들이 정치희망자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걸 정치권만 모르는 듯하다. 하긴, "믿고픈 대로 보인다"는 말 처럼, 출마자는 저마다 자신이 적임자라 확신할테니 그들에게 객관적 판단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겠다. "우국충정은 내가 No1"이라 생각해서건, 그간 해왔던 게 출마고 정치니까 또 나왔건, 권력욕과 명예욕이 끓어넘쳐서건, 그들은 뭔가에 씌워서 진짜 민심을 읽기 힘들다. 눈 앞에 오로지 당선증만 어른거릴테니까.
 
실례로, 이번 여당 후보중 전주을(乙)선거구에 공천된 L모씨에 대해 경악하고 통탄하는 사람이 많다. 주가조작전과자(사건번호 2003고약41852. 벌금형 1500만원)인 그는 자기가 세운 회사(E항공)의 주식지분(51.7%)을 20~30대 자녀들에게 진작 물려주고, 직원들 임금은 체불한 채 다른 항공사에 회사를 팔았다. 코로나사태로 업황이 나빠지기 전부터 이미 직원급여는 물론이고 연말정산반환금 조차 제대로 주지 못한 사람이 자칭 '대통령경제브레인', '문재인정부 경제디자이너'라고 자가발전하고 있다.
 
지역 사회와 E항공 노조를 중심으로 회사매각대금 일부와 사주 가족 사재출연을 촉구하는 <청와대국민청원>을 곧 낸다고 한다. 전주시민과 E항공 직원 사이에서는 "시스템공천이라는 민주당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후보적합도심사를 통과해 당내 경선에 나가고 공천까지 받을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얘기가 상당하다는 전언이다. E항공 직원 S씨는 "일반 기업인이 이랬다면 벌써 조사가 진행됐을 사안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여든 야든 이런 사람 한둘이 아닐 터이니 정치가 손가락질 받고 정치염증과 불신이 커지는 것이다. 이런 후보가 당선되면 어떻게 국회의 권위와 정통성을 승인할 수 있을까.
 
또 하나. 선거 끝나면 언론을 장식하곤 했던 9전10기류 신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힘들 거 뻔히 알면서도 지역구도 깨려 사지를 찾은 '바보 노무현' 케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9전10기가 과연 입지전이라 칭송할 일일까. 빨리 없어질수록 좋았을 구시대 유물은 아닐까. 불굴의 집념은 높이 사야겠으되, 9전10기면 얼추 40년! 당선 뱃지가 40년 세월과 노력에 걸맞는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곁가지지만, 내 기억으론 그 신화의 주인공들 거의가 재선에 실패했다).
 
이제는 사법시험이 폐지돼 쓸 일이 없어졌는데, '고시 낭인'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의 뉘앙스는 '고시에 인생을 걸었다가 피폐해진 경우'를 일컬을 게다. 정치 낭인도 비슷하지 싶다. 농업사회나 도농복합 이행기에 어쩌다 나온 사례라 구시대 유물이라 표현했다. 불쾌한 분도 계실 터인데, 미리 사과드린다.
 
언론은 그런 기적을 화제거리로 다루면서도 은근히 미화했다. 두세 번 도전은 몰라도 7전8기, 9전10기는 나오지 않는 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나은 게 아닌가 싶다. 홍수환선수가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기어코 일어나 역전 카운터블로우를 날린 것과는 다른 거 아닌가 말이다.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서는데 피는 줄도 몰랐던 벚꽃이 만개한 걸 뒤늦게 보며 떠오른 상상 하나.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나 의원 특권/특혜에 중독된 이들 말고, 영화 <주유소습격사건> 식으로 "이거 하나는 꼭 바로잡겠다", "4년을 바쳐 이거 하나는 꼭 고친다"는 사람들이 주로 출마하고, 유권자들은 그들이 내건 '그 하나'를 보고 투표하는 상상. 백면서생의 일장춘몽인가, 정녕 백년하청일까. 투표소 앞은 아까보다 줄이 훨씬 길어졌다. 사회 진보에 획을 긋는 선거, 과거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선언하는 역사적 선거이길 바란다. 내일이다.
 
이강윤 언론인(pen33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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