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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16화)기차역 대합실에서의 기억 여행
2020-01-06 08:00:00 2020-01-06 17:38:23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슬류쟌카 역 근처에 오래된 증기기관차 L-3504(레베쟌카)가 놓여 있다. 그 뒤에 보이는 급수탑은 철도 연락역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1900년 유형을 온 폴란드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사진/필자 제공
 
인내심 학습
 
폭우로 인해 모든 열차의 운행이 취소되면서 슬류쟌카 역의 매표소 창구에는 표를 환불받는 승객들과 문의하는 사람들로 줄이 이어졌다. 기계를 제외하고 창구는 단 둘, 장거리 열차표와 교외선 승차권을 살 수 있는 창구가 각각 하나씩 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표를 환불받고 후속 열차에 대해 문의하는 나에게 매표소 직원이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오래 전 러시아 생활의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승객들이 같은 질문을 계속 하니 그들도 얼마나 피곤하랴.
 
사실 불친절한 태도는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매표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국영이었던 사회체제의 유산 때문인지, 상점에서도, 학교 식당에서도, 방을 배정해 주던 기숙사 행정 부서에서도, 불친절은 1992년 초 러시아에 도착한 이래 익숙해진 문화였다. 외국인들에게 필수로 요구되던 거주등록증과 방학 중 자기 나라에 갔다 오는 데도 필요했던 비자 업무 관련의 학교 내 담당자 사무실은 악명이 높았다. 그 사무실에서 울면서 나오는 여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수업을 빼먹고 와도 그건 그 학생의 사정일 뿐, 담당자가 옆의 동료와 수다라도 시작하면 그것을 마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장거리 열차 매표 창구(좌)와 교외선 매표 창구(우)에서 열차 운행에 대해 문의하는 승객들. 사진/필자 제공
 
방학이 다가오면 조국에 다녀오기 위해 비자 신청을 하는(이상한 시스템이지만 당시는 그랬다) 외국 유학생들이 추석 귀성표 줄처럼 늘어섰는데, 종국에는 복도에 주저앉아 빵을 먹으면서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에서 길러진 인내심은 이후 프랑스에서 체류증을 갱신할 때마다 겪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는데 도움이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어쩌다 방학 때 서울에 오면 놀라운 반대의 경험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지하철역 즉석사진기로 증명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기계가 고장이 나 있었다. 수리하시는 분이 난처한 표정으로 미안해하시며 말했다. “한 20~30분 기다리셔야 하는데 다른 역에 가시면 어떨까요?” “물론 기다리지요! 겨우 20~30분인걸요!”
 
모스크바 시절 초창기,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선 학생들의 태도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급식 담당자들은 그들끼리 대화를 하느라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도 한참동안 배식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아무도 밥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저 책을 보거나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멀뚱멀뚱 기다릴 뿐이었다. “왜 아무도 식사를 달라고 하지 않나요?” 내 앞에 서 있던 학생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들이 화를 내고 오히려 밥을 주지 않을 걸요.”
 
급식 담당자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배식을 기다리던 학생식당은 이 제 1인문관(현재는 신관으로 이전됨. 로마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 소속) 근처에 있었다. 다행히 기숙사 식당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 사진/필자 제공
 
기차역 매표소에서 떠올린 기억들 
 
바로 그런 상황이 1992년 12월, 나와 기숙사 선배 언니가 시베리아 횡단열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한 기차역에서 반나절 가까이 시간을 허비했던 순간에 일어났다. 매표소 창구가 여럿 있었지만 창구마다 사람들로 북적댔고 끊임없이 새치기를 하는 아랍인들 때문에 줄은 더디게 줄어들었다. 그들은 한 명이 서 있으면 표를 사기 직전 어느새 대여섯 내지 예닐곱 명으로 불어나는 것이었다.
 
이번에 기차 안에서 만났던 시현, 하림 씨가 나중에 들려준 경험담에 의하면, 크렘린 궁에 입장할 때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새치기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한다. 러시아인 아르바이트생이 미리 줄을 서면 중국인 가이드가 도착해 그에게 돈을 주고 단체관광객들을 입장시키는 것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방식은 비슷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그것을 당연시하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필자가 방문한 날은 크렘린 궁의 정기 휴일이어서 입장객들의 긴 줄과 '새치기' 현상을 보지는 못했다. 관광객들이 밖에서 성 바실리 대성당을 구경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1992년 겨울, 한참을 기다려 마침내 우리 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선배언니가 창구 직원에게 질문을 두 갠가 세 갠가 해버린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열차와 관련해 뭔가 확인하는 질문이었는데, 물론 그 언니가 질문을 한 것은 전혀 잘못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곳이 러시아의 기차역 매표소라는 점 그리고 질문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선배가 확인차한 질문이 창구 직원에게는 자기 말을 못미더워하는 모습으로 비쳐져 기분이 상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불안한 느낌이 들어 질문을 계속 하는 선배에게 만류의 눈짓을 보냈지만, 마침내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 지른 것이다. “표 안 팔아!”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은 이렇게 문화 차이인지, 체제 차이인지, 정서 차이인지, 일처리 방식과 속도의 차이인지, 여러 이유에서 찾아왔고 유학생들은 경험담을 나누며 러시아 사회를 배워나갔다. 선배나 나나 화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반나절이나 허비했는데 이제 와서 표를 포기할 순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나는 바로 옆 창구로 몸을 돌려(거기에 줄 서 있던 사람도 양해해 주었다) 사정했다. “당신의 동료가 질문을 많이 한다고 화를 내며 표를 안 판다 하니, 당신이 제발 우리에게 표를 팔아 주세요.”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며 항의해봤자 표를 못 살 뿐이고 학생식당에서 항의해봤자 밥을 못 먹을 뿐이다. 다행히 옆 창구의 직원이 표를 팔아준 덕분에 우리는 그 겨울 이르쿠츠크로 떠났다.
 
모스크바에서 뚤라로 가기 위해 들른 꾸르스키 역의 매표소. 인터넷 예매 덕분인지 창구들이 한산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사진/필자 제공
 
이르쿠츠크로 가는 길
 
그러나 1990년대의 러시아에서도 ‘직장’이 아닌 거리에서 길을 물으면 항상 친절한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공적인 장소에서 직업적인 불친절은 만연했지만 일단 사적인 친근감을 얻게 되면, 예를 들어, 개인 간에 ‘인간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무뚝뚝함이 사라지고 정을 주는 친절함이 등장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직업적 불친절이 만약 사회주의 시절의 유산이라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우리나라의 서비스 산업 종사자들은 지나칠 정도의 직업적 친절을 강요받고 아직도 ‘손님이 왕’이라고(돈이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고객들의 ‘갑질’ 행위에 시달린다. 극과 극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러시아를 찾은 내가 심(SIM)카드를 사러 들어간 블라디보스토크의 휴대폰 가게에서 그리고 하바롭스크의 식당에서 접했던 청년 직원들의 친절함은 러시아의 서비스 산업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새삼 느끼게 만든다.
 
처음에는 퉁명스러웠던 슬류쟌카 역의 교외선 표 창구 직원이 태도 변화를 보인 것은 조금 뜻밖이었지만, 예전에 경험으로 배운 러시아인들의 정서가 생각나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외국인이라 혹시 이르쿠츠크행 열차가 와도 안내방송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기차를 놓칠까봐 걱정된다고 ‘인간적으로’ 말하자 그녀가 나에게 갑자기 친절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녀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아직 아니다’라는 표시를 해주었다.
 
여러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이르쿠츠크행 교외선 안내방송이 나오고 승객들이 몰려갔다. 이번 열차의 좌석 이웃은 이르쿠츠크 근교의 집으로 돌아가는 갈랴 씨와 그녀의 손자 게라(게르만의 애칭)이다. 사실 슬류쟌카 역에서부터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터라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은 교외선에 오르자, 갈랴 씨의 맞은편에 나와 게라가 앉았다. 멋쟁이 할머니를 둔 게라는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인데, 보통의 러시아 어린이들보다 행동이 과한 편이다. 아픈 딸을 대신해 손주를 키우는 갈랴 씨는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의 행동을 받아주다 보니 버릇이 없어졌다고 말하면서 게라에게 주의를 준다.
 
모스크바 시절, 학교 기숙사 근처에서 본 어떤 젊은 엄마의 교육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네다섯 살쯤 돼 보이는 그녀의 어린 아들은 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마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길을 가는 게 아닌가. 나는 불안한 마음에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엄마가 안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아이는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벌떡 일어나 아장아장 따라갔다. 아이들이 식당에서 뛰어다녀도 내버려두는 젊은 엄마들을 우리나라에서 보다가 그런 모습을 목격하니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차창 밖으로 빗물이 차오른 길들과 숲이 지나간다. 자작나무와 시베리아 소나무도 비에 흠뻑 젖었다. 슬류쟌카의 갈랴 씨 친구가 만들었다는 빵을 함께 나눠먹고 게라와 게임을 하며 나는 26년 만에 이르쿠츠크로 향한다.
 
이르쿠츠크로 가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물에 잠긴 숲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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