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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휴전도 없는 한국 국회
2019-12-29 12:00:00 2019-12-29 12:00:00
크리스마스 휴전(Trêve de Noël)이라는 용어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영국군이 비공식적으로 휴전을 선포하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했다. 191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전쟁 중에도 적군들은 휴전을 선포하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는 낭만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왜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벌이며 고성을 주고받는가. 1차 세계대전보다 더 위급한 사태라도 벌어졌단 말인가.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는다. 
 
패스트트랙 법안(신속처리 안건)을 저지하기 위해 인간띠를 만들어 육탄전을 벌인지가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국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의원들은 필리버스터를 벌여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3일간을 보냈다. 국회는 본시 법을 만드는 곳인데 우리는 의원들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설전을 벌이기보다 멱살 잡고 소리 지르고 벌렁 드러눕는 장면들만 계속해서 보여 왔다. 따라서 “국회는 저런 곳이야”라고 생각할까 걱정이 앞선다. 
 
그럼 프랑스 국회는 어떠한가. 지금 프랑스는 우리와 달리 환경문제가 당면과제다. 따라서 환경에 관한 법안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갈등을 겪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소비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반낭비법을 법제화하기로 했다. 이 반낭비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반낭비법 담당자는 환경부의 국가비서(차관급) 브륀 푸아르송(Brune Poirson)이다. 그녀는 2017년 6월 마크롱 정부에 들어간 37세의 미국계 프랑스인으로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때때로 소란스런 국회의원들의 공격을 받으며 토론을 이끌어야 했다. 지난 9월 보수가 장악한 상원에서 그녀는 플라스틱병에 대한 수칙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그때 중도파 에르베 모레(Hervé Maurey) 의원은 그녀를 희화화하며 국회를 웃음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푸아르송은 “나는 아직 어리고 좀 바보스럽다. 나는 여러분들보다 경험이 적다. 나는 정치인 출신이 아니다”라고 반어적으로 응수하며 심리전에서 밀리지 않았다. 반낭비법에 대한 토론은 하원인 부르봉 궁(Palais Bourbon)에서도 벌어졌다. 부르봉 궁에서는 상원에서보다 토론이 덜 격렬했다. 그렇지만 푸아르송에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2040년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 사용금지법을 둘러싸고 환경당 의원들이 격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엔지오단체인 WWF(세계자연기금)와 영화배우 피에르 니내이(Pierre Niney) 등이 2040년은 “너무 늦다”고 공격했다. 프와르송은 “가능한지 최선을 다해 타진해 보겠다”라고 말하며, 그러나 “이행을 유도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20년 안에 일회용 플라스틱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말한다면 이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지자들도 때때로 정면대결 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결국 반낭비법은 지난 20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플라스틱 포장 금지법을 둘러싼 법안은 아직 남아있다. 그러나 푸아르송 국가비서가 프랑스 상·하원에서 반낭비법안을 법제화하기 위해 의원들과 부딪치면서 설전을 벌이고 때론 설득까지 하면서 완주하는 과정은 꽤 인상적이다. 우리처럼 고성과 삿대질만 오가다 결과도 없이 문을 닫는 국회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국회에서 하나의 안건이 통과되는 데는 적지 않은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 프랑스 국회도 우리처럼 온갖 군상들이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회가 우리보다 나은 이유는 정치인들의 자질이 그나마 탄탄하기 때문은 아닐까. 37세의 풋내기 정치인 푸아르송이 노련한 정치인 모레 의원을 상대로 설전을 벌이며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자질 때문이다. 그녀는 고등학생, 대학생 때부터 집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개발도상국가에서 필드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영국 혁신기관 네스타(Nesta)에서 파견 활동을 했고 인도 국무총리의 고문 샘 피트로아(Sam Pitroda) 연구실에서 경험을 쌓았다. 또한 인도의 프랑스 개발청에서 일했고, 물이 필요해서 기다리거나 몇 시간을 걸어야만 물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식수를 얻을 수 있게 상수관을 개발하는 프랑스 상하수도 관리 기업 베올리아(Veolia)에서 일했다. 
 
전문가로서 탄탄한 이력을 가진 그녀였기에 국회에서 기품 있게 자기 법안을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국회가 매번 난장판이 되는 이유는 아마도 실력 있는 정치인들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본질을 잘 모르니 소리만 지르고 기싸움만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가 사실상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각 당은 제발 실력 있는 사람들을 공천하길 바란다. 20대 국회가 최악이란 말을 줄곧 한다. 필자의 기억으론 19대 국회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21대 국회에서도 또 들을 것만 같다. 이런 생각이 망상이 되도록 한국의 정당들이여 제발 인재를 발굴해 잘 공천하라. 무조건 선거만 이기는 게 장땡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를 퇴보시켰다는 오명을 더 이상 써서야 되겠는가.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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