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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생생한 신해철 손길, 미래에서 온 음악 EOS
신해철이 남겨준 도전과 실험 “26년 전 ‘그 날’ 어제처럼 선명해”
2019-12-06 12:00:00 2019-12-06 12: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스무살이 되던 해, 그는 고(故) 신해철(1968~2014)을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당시 신해철은 넥스트(1992년작·1집 ‘Home’)로 전자음악의 심한 갈증을 해소하던 시기. 테크노의 첨단 신호가 부유하는 ‘도시인’ 같은 곡들을 마구 쏟아내던 때였다.
 
“해철이 형을 처음 본 순간 얼음이 돼 버렸죠. 당시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남다른 분이셨으니까.”
 
가수 김형중에게 26년 전 ‘그 날’은 어제처럼 선명하다. 1993년 테크노 그룹을 표방했던 EOS(과거 팀명 이오스, 현 팀명 이오에스)를 결성하던 무렵. 넥스트의 신해철이 만나보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얼마 뒤 녹음실에 그가 정말로 찾아왔다.
 
서태지와 아이들 출현 직후였던 당시는 유사 댄스 음악이 범람하던 시대. 전자 음악을 밴드적으로 구현하던 EOS의 실험성은 대번에 신해철 눈을 사로 잡았다. 넥스트의 테크노적 밴드 사운드를 이을 그룹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EOS 데뷔 앨범 ‘꿈, 환상 그리고 착각’에는 작사가 겸 프로듀서 신해철 세 글자가 고이 새겨졌다.
 
1993년 테크노 그룹을 표방하며 발매한 EOS 데뷔 앨범 '꿈, 환상, 그리고 착각'. 신해철이 작사가 겸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사진/벅스뮤직
 
‘세상엔 잘난 사람들이 많겠지만/자기 자신은 오직 지구 위에 한 명이다’(곡 ‘EOS’), ‘이제 너와 나는 서로가 영원히/다시 올 수 없는 각자의 길을 가네’(곡 ‘각자의 길’)…. 짧은 머리에 선글라스, 숄더 키보드를 두르고 나타난 당시 EOS는 자아와 세계 고민을 뱉어내던 신해철식 가사를 전자음에 버무리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달 27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인근 합주실에서 밴드 EOS를 만났다. 보컬 김형중을 필두로 기타리스트 조삼희, 베이시스트 배영준이 새롭게 꾸린 팀이다. 나머지 두 멤버와 달리 김형중은 EOS의 전신이자 역사. 26년 전 신해철의 손길을 여전히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해철이형이 아니었으면 EOS는 주목받지 못했을 거예요. 그냥 새로운 음악하는 여러 밴드 중 하나였겠죠. 형은 말로 무언가를 조언하고 그러지 않는 분이셨어요. 조언보다는 묵묵하게 몸소 보여주시는 분이셨어요.”(형중)
 
신해철은 당시 EOS의 작업 방식을 철저히 존중했다. 악기소스를 바꾸거나 연주를 바꾸기 보다는 보컬이나 코러스 라인을 다듬는 선에서 조력자의 역할 정도를 했다. “아예 자신이 손을 대야 하는 음악이었다면 시작조차 안 하셨을 거예요. 그런 점에선 형이 인정하는 후배라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형이 써줬던 가사 역시 지금 EOS에게 일종의 전신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형중)
 
이오스였던 과거 팀명은 이제 이오에스로 불린다. 왼쪽부터 조삼희, 김형중, 배영준. 사진/파자마공방
 
1997년 정규 3집을 끝으로 오랜 기간 활동을 중단했던 밴드는 결성 25주년이던 지난해 다시 새롭게 팀을 꾸렸다. 이승환과 신승훈의 세션이자 김현철 10집 프로듀서로 활동한 조삼희, 밴드 Kona와 W의 리더였던 배영준이 새롭게 합류했다. 팀의 영문 이름은 EOS로 전과 동일하지만 우리말 표기법은 다르다. ‘그리스 여신’에서 따온 과거 이오스는 이제 이오에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Excuse Our Survival’. 음악은 생존의 변명이란 의미심장한 뜻을 새겼다.
 
“대중음악계에서 밴드로, 이렇게 오랜 시간 살아남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우린 그 쉽지 않은 길을 간다는 의미로 약간은 비장한 이름을 짓게 된 거예요.”(형중)
 
90년대 각자의 밴드, 세션으로 활동하던 셋은 각자의 지인들 소개로 알게 됐다. 적지 않은 음악적 신뢰를 쌓아온 끝에 지난해 ‘파자마 공방’이란 독립 레이블을 함께 세웠다. 대중에 닿으려고 애쓰는 음악보다 자신들에게 편안한 잠옷 같은 음악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담았다.
 
“여전히 철없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음반기획(A&R), 앨범 재킷, 디자인, 스케줄 조율 같은 것까지 해야 해서 부지런해야 하긴 한데, 분담해서 하다보면 어찌됐든 즐거워요.”(영준)
 
지난달 27일 서울 회기역 인근 합주실에서 연습 중인 밴드 EOS를 만났다. 사진/파자마공방
 
밴드는 지난해 결성 25주년을 기념하는 앨범 ‘25’를 시작으로 세 장의 EP를 내왔다. 퓨처하우스, 빅 비트를 근간에 두는 전자 음악은 과거 이오스 때의 테크노보다 세련되다. 여기에 록적인 기타 사운드와의 황금 비율, 철학적이며 시적인 가사는 지난날처럼 미래적이다.
 
“우리 음악은 옛 추억을 어루만지는 음악은 아니에요. 한 평론가 분께서 ‘미래에서 온 음악 같다’고 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 표현이 좋았어요.”(영준)
 
“26년 전 이오스를 멈추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이런 음악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밴드는 한 곳에 머무르기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생각도 들어요. …EOS는 해철이형이 남겨 준 유산 아니었을까…”(형중)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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