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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조지오웰식 ‘디스토피아’ 뒤집은 밴드 블랙홀
14년 만에 정규 9집으로 돌아와 “스토리 명확한 앨범 만들려다 길어져”
글로벌 팝 요소 섞은 헤비메탈 “미래는 결국 인간 내면 성장에 달려”
2019-11-23 06:00:00 2019-11-23 06: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를 가득 메우는 대중 음악의 포화에 그들의 음악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밴드 블랙홀은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아 9집을 냈다. 8집 ‘Hero(2005)’ 이후 무려 14년 만의 정규 앨범. 블랙홀 역사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5일 오후 3시경, 서울 송파구 잠실동 인근 아지트합주실에서 만난 밴드 멤버들[주상균(보컬·기타, 56), 정병희(베이스, 54), 이원재(기타, 49), 이관욱(드럼, 43)]은 “우리의 연주는 계속됐지만,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고민은 계속되던 시간이었다”며 “스토리가 명확한 정규 앨범을 만들려다 보니 더 길어진 점도 있다”고 정리했다.
 
“음반이 음원시장으로 바뀌고 헤비메탈이 내리막길로 치닫는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2014년 ‘HOPE’ 앨범 활동도 세월호 사태 때문에 취소했고요. 시대를 살아보니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린 우리의 의무가 있는 것 같았어요. 듣던 안 듣던 우리가 살아있는 음악을 하자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어요.”(주상균)
 
블랙홀 멤버들. 왼쪽부터 정병희(베이스·54), 이관욱(드럼·43), 주상균(보컬, 기타·56), 이원재(기타·49).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진화란 뜻으로 볼 수 있는 새 앨범명이 의미심장하다. ‘Evolution’. 미래의 특정 시점을 상상했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적 미래 상상을 이들은 거꾸로 그려냈다. 인공지능(AI)과 접합할 인간, 더 빨라질 생산 능력, 기계와의 공생,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활용되는 기술…. “저는 결국 미래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봐요. 다수를 위해 기술을 활용할 것인지, 그에 반대할지 싸움은 끊임없이 일어날 거예요. 하지만 겪다보면 결국 인간 내면은 성장하죠. 그것을 저는 진정한 진화라 봐요.”(주상균)
 
인간과 능력을 나누는 인공지능(곡 ‘AI’), 사람 대신 사랑을 나누는 로봇(‘러브봇’). 얼핏 코 앞에 닿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트랙에 갈수록 이들은 몇 백년 후 미래를 상정한다. 내면 성장을 이룬 ‘초휴먼’이 가꿀 유토피아적 세계.(곡 ‘유토피아’) “영상통화를 보면 어릴 때 책으로나 읽던 빅브라더가 우리 곁에 와있죠. 미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어요. 인류는 그렇게 무지하거나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주상균)
 
밴드 블랙홀 정규 9집 'Evolution'. 사진/밴드 제공
 
사운드적으로도 새 앨범은 진화를 선택했다. 평소 포르투갈 전통음악 파두, 러시아 대중가요, 글로벌 팝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이들은 블랙홀 메탈 만의 이상적 황금 비율을 연구해왔다. 실제로 새 앨범의 드럼 녹음에는 마이크 대신 팝 가수 케이티 페리가 쓴 VST(가상 스튜디오 기술)이 사용됐다.
 
“케이티 페리의 팝은 드럼만 듣고 있으면 완전히 헤비메탈이에요. 킥 하나 만으로도 리듬이나 사운드 선명성이 엄청나죠. 사람이 치는 리얼 드럼은 풍부하고 부드러운 감은 있으나 깔끔하고 강한 임팩트를 주긴 힘들죠. 세계의 헤비메탈과 조금 다른 차원에서 도전해보고자 했어요.”
 
과거 밴드는 공중파 3사 가요 프로그램 순위 폐지를 위한 공연도 진행했었다. ‘문화 혁명’이란 타이틀로 진행한 당시의 움직임은 TV가 가두는 ‘음악 프레임’에 맞서며 결국 순위 폐지를 이끄는 소기의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순위 프로그램은 다시 생기고 음원사이트는 일렬로 줄을 세운다. 대형기획사 등이 짜는 프레임은 여전히 메탈 음악을 투명 음악 취급한다. 
 
“출발선부터 공정치 못한 환경임은 분명하죠. 하지만 우리 역시 흩어진 커뮤니티, 뮤지션과 연계해서 정보를 교환하는 노력이 필요할 거예요.”(주상균) “방송도 방송이지만 개인 미디어를 갖고 소통할 수 있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이원재)
 
블랙홀 멤버들. 오는 12월14일 단독 공연을 앞두고 유튜브 채널까지 찍느라 분주하지만 그들은 유쾌했다. 사진/블랙홀 공식 유튜브 채널
 
멤버들에게 데뷔 30주년을 맞은 블랙홀은 어떤 의미일까. 여행지로 표현해달라는 물음에 멤버들은 제 각각의 대답을 내놨다. 
 
“온천이요. 알몸으로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고 따뜻하고 몸에도 좋고. 저희 음악은 악영향을 끼치는 거 아닌 거 같아서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갑자기 서슬퍼런 시절의 ‘건전가요’가 떠오르는데요? 하하. 아무튼 몸이 개운해지고 그런 음악이라 자부합니다.”(주상균)
 
“나는 음악이 와 닿고 그런 느낌을 보면 바다가 생각나. 해가 거의 떨어질 무렵, 하루를 마감하는 낙조.”(이원재)
 
가만히 듣고 있던 정병희가 “온천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꼬집자 모두들 웃음이 터진다.
 
“나도 생각났네. 정방폭포. 폭포 밑에서 ‘까맣게 흐르는~ 깊은 이 밤에~’(‘깊은 밤의 서정곡’) 하고 샤우팅 확 지르는 거지. 정방폭포 같은 밴드. 근데 이거 기사 제목으로 가는 거 아니죠?”(정병희)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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