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9화)고대인과 현대인의 공존
입력 : 2019-11-18 06:00:00 수정 : 2019-11-18 06: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동·서로 오간 유형(流刑)의 세월 
 
나나이족 마을 시카치알랸을 이틀간 연달아 방문하게 된 것은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만큼 귀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딱히 숙박할 곳이 없는 이 작은 마을은 보통 단체 투어로 가는 곳인데다가, 그 단체 투어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나는 첫째 날은 택시로, 둘째 날은 버스로 두 번 다녀오게 되었다. 혼자 움직이는 것은 단체 속에 있을 때보다 어렵거나 불편할 수 있지만, 반면 자유롭고 느긋해지며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시카치알랸 마을사람들과의 만남이 그러하다.
 
시카치알랸의 암각화 견학은 주로 단체 투어로 진행된다. 첫 번째 방문 날 우연히 마주친 단체관광객들과 오른쪽에서 설명 중인 담당자 율랴 씨. 사진/필자 제공
 
첫날 탄 택시의 아르바이트 운전기사 로만 씨와 대화가 길어지면서 그의 외조부모가 우크라이나를 떠나 극동 지방으로 온 이유를 알게 됐다.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탈린 시대에 정치적 이유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것이다. 강제 이주의 희생자는 고려인만이 아니다. 우거진 타이가 숲의 극동에 떨어진 러시아인들이나, 허허벌판 중앙아시아에 떨어진 고려인들이나 막막하기는 매 한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이 대륙의 주인이 된 러시아인들이 소수민족보다는 훨씬 유리했으리라.
 
로만 씨의 말에 의하면,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난 그와 그의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고향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도 그 이후 우크라이나를 한 번도 다시 찾지 않았다고 한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새로운 터전을 일구어냈듯이, 이들도 ‘극동러시아인’으로서 새로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데카브리스트들은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유배를 가고, 로만 씨의 외조부모 역시 서쪽에서 동쪽, 즉 우크라이나에서 하바롭스크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내져 죽음을 맞이한 조선인도 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백마 탄 김장군’이라 불리던 독립군 사령관 김경천 장군(1888~1942). 그는 스탈린 시절 반역죄로 수감되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그리고 다시 우랄 산맥 서북부에 위치한 오지의 북부철도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중노동과 영양결핍으로 사망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간 여러 민족들 중에는 어김없이 고려인들이 있고 그곳의 수많은 희생자들 중에는 ‘영원의 불꽃’ 전사자 명단에서 볼 수 있었던 ‘김, 이, 박...’씨들이 숨어 있다.
 
시카치알랸 마을 아무르 강가의 암각화 구역을 알리는 표지판. 운전을 했던 로만 씨(좌)와 암각화 구역을 안내해 주는 발렌틴 씨(우)의 모습이 표지판 뒤로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고대 암각화 옆의 생활 낚시
 
시카치알랸 마을에 도착은 했지만 암각화 투어가 미리 약속되어 있던 것도 아니어서 혼자 찾아야 했다. 내가 딱해 보였던지 로만 씨가 앞장서서 마을 주민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강가에 차를 세워 두고 바위들을 뒤지는데, 낚시 중이던 나나이족 주민 발렌틴 씨가 선뜻 안내를 해 준다. 한쪽에 서 있는 표지판에는 이곳이 기원전 12,000년에서 기원후 1,0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시카치알랸의 암각화가 있는 문화유산 대상 구역이라고 쓰여 있다.
 
후에 찾아본 러시아 박물관 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시카치알랸 암각화는 신석기 초기인 기원전 10,000~13,000년에 시작되어 기원후 4~13세기경 끝난 것으로 추정되며, 약 120개의 현무암 바위와 바위 노두(露頭)에 동물, 사람, 마스크, 사냥 장면 등의 암각화들이 350개 정도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물론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암각화들만 볼 수 있지만 여전히 경이롭다. 다음날 나를 다시 안내해 준 담당자 율랴 씨는 1970년대에 학자들이 최소 300개 이상의 암각화가 있음을 연구했고 2019년 현재는 약 50개 정도만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매머드가 그려진 암각화. 형상이 잘 보이도록 물을 끼얹은 상태이다. 사진/필자 제공
 
“이것은 마몬트예요.” 암각화들이 잘 드러나도록 바위에 물을 뿌리면서 발렌틴 씨가 말했다. 러시아어로 마몬트는 매머드, 즉 코끼릿과의 화석 포유류이다. 그는 이밖에도 동심원, 사람 얼굴 또는 마스크, 물고기 형상이 묘사된 바위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해 아니면 달입니다.” 발렌틴 씨는 나나이족의 전설인 세 개의 태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세 개의 해 이야기는 나나이족 전설상 최초의 인간인 호다이, 먀멘디 남매의 에피소드들 중에 나온다. 해가 세 개라 강물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물고기들이 죽고 사람들이 살기 어려워지자 누이인 먀멘디가 호다이에게(러시아어로는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구분되지 않지만 나나이족의 영웅 같은 존재이다) 여분의 해들을 없애라고 말한다. 호다이가 높은 산에 올라가 활을 쏘아 두 개의 태양을 없애자 강물의 뜨거운 온도가 가라앉고 물고기도 사람도 평온하게 살게 됐다는 얘기다.
 
소녀 형상의 암각화. 머리에서 나온 돌출부는 땋은 머리 모양이다. 형상이 잘 보이도록 발렌틴 씨가 물을 뿌려 보여주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낚시하던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발렌틴 씨가 내게 양해를 구한다. 이 선량한 주민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나는 로만 씨가 귀띔해 준 덕분에 매우 적지만 약간의 성의 표시를 할 수 있었다. 발렌틴 씨에게 낚시는 생존을 위한 일상이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계절에 따라, 또 가족 당으로, 어획량에 제한도 있다. 이들 소수민족의 어려운 생활을 극동러시아인인 로만 씨는 잘 이해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암각화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오지만, 마을 주민들이나 나에게는 일상일 뿐이지요. 그래서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지나치게 됩니다.” 그의 말처럼, 고대 암각화들은 그들의 평범한 일상 속 일부일 뿐이다. 그저 ‘생활’이니 현지인들은 암각화 바위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시카치알랸의 마을사람들은 암각화 바위들이 있는 지점에서, 그 앞 또는 옆의 바위에 걸터앉아 낚시를 한다. 그러한 그들을, 이 현대의 후손들을, 고대인들의 흔적이 바람처럼 공기처럼 그들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발렌틴 씨처럼 마을 주민들은 고대의 암각화 바로 옆에서 낚시를 하는 게 일상이다. 사진/필자 제공
 
탈출을 꿈꾸는 자식 세대, 남겨진 부모 세대
 
마흔 살인 로만 씨는 뻬쩨르(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일컫는 러시아인들의 줄임말)에서 대학을 다니는 1학년생 딸이 있다고 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현재의 러시아 젊은이들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을 제공한다. 그의 딸은 하바롭스크를 탈출하고 싶어 했고 뻬쩨르로 떠났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만난 러시아 여고생도 뻬쩨르에 있는 대학으로 가길 원한다고 했었다. “젊은 세대는 떠나길 원해요.” 모스크바도 상트페테르부르크도 아닌, 극동의 한 도시에 있는 젊은이들 중 서쪽의 유럽러시아를 꿈꾸는 이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더 시골에 있는 청춘들은 근교 도시인 하바롭스크로 유학을 오기도 한다.
 
로만 씨는 지인의 딸이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정착했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떠나고,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결혼해 성공을 꿈꾸는 러시아인들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러시아를 떠난 이들이 이미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70~80년대에도 낯선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로만 씨는 소비에트 시절이 나쁘지 않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줄이 길고 급료도 적었지만 충분히 살 수 있었어요. 의료와 교육도 잘 되어 있었고요.” 반면, 지금은 물건이 넘치지만 살기는 힘들게 바뀐 상황이며, 본인은 ‘큰 시골’인 하바롭스크가 좋지만 젊은이들은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운전을 해 준 로만 씨(좌)와 암각화로 안내해 준 발렌틴 씨(우). 발렌틴 씨가 형상이 잘 보이도록 양동이로 물을 나르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1992년 2월, 처음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국영상점으로 달려갔다. 당시 9시 뉴스 보도를 믿지 못해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려 한 것이다. 뉴스 보도대로 진열대는 텅텅 비어 있었고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사기 어려웠다. 그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물건은 쌓였지만 다수의 러시아인들은 그것을 살 수 없는 시절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와 유사한 얘기를 2019년 하바롭스크 주민에게서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극동러시아가 유럽러시아보다 살기 어렵기 때문일까? 모스크바 토박이인 러시아 친구는 최근 몇 년 사이 구소련 공화국 출신들이 일거리를 찾아 모스크바로 몰려들고 있다고 전했다.
 
내일 다시 시카치알랸에 올 것을 기약하고 하바롭스크로 돌아오는 길, 도로 양옆으로 새로 건설된 ‘다차’들이 보인다. 다차는 오두막, 농가 스타일의 소박한 여름 별장이다. 예전엔 다 들판이었는데 다차가 계속 새로 생기고 있다고 한다. “꼭 도시의 부자들만이 짓는 건 아닙니다. 여기 현지인들이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짓기도 하지요.”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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