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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버텨온 당신을 위로하는 ‘82년생 김지영’
2019-10-30 00:00:00 2019-10-30 21:56:45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젠더 갈등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건 사실 이 영화 때문이라기 보단 인식에서 불거진 사고의 문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먼저 이 영화를 페미니즘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안타깝다. 단언컨대 이 영화는 우리 삶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담고 있다. 젠더 갈등으로 불거질 빈틈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사고의 착각일 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할 줄 알았다. 하더라도 아주 늦은 나이에 할 줄 알았다. 결혼 상대는 지극히 다소곳하고 집에서 살림만하며 오첩반상 차려놓고 나의 퇴근을 기다릴 줄 하는 여성. “조선 시대에서 왔냐는 얘기를 들을 만큼 지극히 보수적인 사내가 나였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3년간 연애하고 결혼했다. 연애 기간은 길었지만 결혼은 시속 300km 초스피드였다. 양가 인사부터 예식까지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결혼식 전날 아버지를 제외한 집안 남자들과 총각 파티를 했다. 특별한(?) 파티는 아니다. 매형 큰형 작은형 등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집안 남자들과 호프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내일이면 네 자유도 끝난다는 형들의 말에 어디 여자가 감히” “버르장머리 없이 남편한테라고 호기롭게 쏟아낸 나다. 2007년 내 모습이다.
 
그때의 난 그랬다. 아들선호사상이 지배한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30대 초반이기에 그런 내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여자가 감히? 버르장머리 없이 남편한테? 지금 난 아내에게 꽉 잡혀 사는 공처가, 애처가, 아니 그냥 간쫄남’(간이 쫄아서 뱃속에서 사라진 남자)이다. 오첩반상은 고사하고 아내가 별다른 반찬 없이 맨밥이라도 차려주면 고마운 처지다.
 
어린 시절 이해되지 않던 모습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고 어머니의 길고 긴 하소연이 시작되면 아버지는 한 마디도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그저 밖으로 조용히 나가시곤 했다. 20~30분 뒤 돌아오는 아버지의 몸에선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 결혼하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가부장적일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한계 속에서 살아온 내가 이 영화에서 공감한 것은 버티고있던 내 삶에 대한 위로였다. 한 시절을 버티며 살아낸 것이 비단 1982년생 김지영뿐이겠나. 시절을 살아내기 위해 꿈을 포기하고 삶을 희생한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아내, 1982년생 김지영뿐이겠나. 아버지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던 어머니가 전투의 승자가 아니고, 그 자리를 피해 자리를 비운 아버지가 패자의 그것은 아니었지 않나. 우리 모두는 그렇게 버텨가며 생을 살아냈지 않은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미덕은 세대 문제나 젠더 문제를 공론화시켰다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단 삶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선택을 하며 버텨왔다는 시대적 공감대를 끌어냈다는 데 있다. 지키기 위해 버티는 삶에 여자 남자란 없다. 그저 지금의 삶을 지키려 버텨온 부모의 선택이 있었고, 우리의 선택이 있고, 다음 세대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김지영은 버티는 자를 대표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젠더 이슈의 잣대만으로 바라본다면 김지영은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최소한 버티고 있는 김지영에게 그건 예의가 아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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