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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서태지·넬·잠비나이…11년 ‘한국 록 전도사’ 자처한 스웨덴 여성
‘인디풀ROK’ 운영자 안나 린드그렌 “한국 록의 핵심은 자기 표현적 음악, 세계에 더 알려져야”
매년 ‘잔다리 뮤직 페스타’로 한국 방문 “케이팝은 특정 장르일 뿐, 한국 대중음악 포괄 못해”
2019-10-04 06:00:00 2019-10-04 10:14:46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넬은 아주 멋진 밴드죠. ‘소태쥐(서태지)’ 레이블(2000년대 초반 만들어진 인디레이블 ‘괴수대백과사전’) 때 낸 3집은 그들의 메이저 1집이었잖아요.”
 
음악적 식견을 놓고 보면 가히 한국인이라 봐도 손색이 없었다. 산울림, 서태지, 신해철, 넬, 잠비나이, 세이수미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음악의 계보를 훤히 꿰고 있었다. 지난달 29일 오후 3시 반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스웨덴 여성 안나 린드그렌(37). 그는 지난 11년 간 한국 밴드 음악을 전 세계에 알려온 ‘인디풀 ROK(www.indiefulrok.com)’의 운영자다.
 
‘인디풀 ROK’은 한국의 록 음악을 전 세계에 소개해 온 최초의 영문 사이트. ROK은 록(Rock)과 한국(Republic Of Korea)의 중의다. 2008년 1월 오픈 이래 린드그렌은 수많은 한국 뮤지션을 이 곳에 알려왔다. 
 
초기 단순 정보 전달 역할을 하던 사이트는 해를 거듭하며 전문성을 띠었다. 인터뷰, 앨범 리뷰, 큐레이션 형태로 고도화됐다.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호주, 스웨덴, 핀란드…. 그가 전하는 한국 밴드 소식은 곧 세계에 닿았다. “데뷔 직전 ‘검줭치마(검정치마)’, 췰공팔공(7080) ‘해봐롸기(해바라기)’ 인터뷰. 11년 간 기억에 남는 일들은 참 많았죠.”
 
지난달 29일 서교동 인근 카페에서 만난 스웨덴 여성 안나 린드그렌. 그는 이날 인터뷰 직후 '잔다리 페스타'를 보러 홍대 인근으로 향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한국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23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1996년 한국 펜팔이 보내준 한 장의 시디(CD). 김건모 3집 수록곡 ‘아름다운 이별’을 처음 들었던 순간. 뜻 모를 기묘한 한국어는 그의 마음을 휘저어 놨다. 한 가수가 발라드, 알앤비, 댄스 등 다채로운 장르를 소화한 것도 충격. 브리태니커 사전을 끼고 스웨덴어 발음을 적어가며 따라 불렀다. 이후 관심은 H.O.T를 향했다가 2000년대 자우림, 체리필터, 넬 등 밴드 음악으로 전향됐다. 
 
“‘사랑해’ 같은 설탕 발린 말만 늘어놓던 영어권 팝 뮤직과는 달랐어요. 음악의 핵심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데, 한국 밴드 음악이 그랬죠.”
 
당시 켄트 같은 스웨덴 록 밴드도 좋았지만 그는 한국 록 뮤지션을 추적하는 게 더 신비롭고 재미났다. 종일 인터넷을 떠돌며 한국 메탈 시디들을 주문하기도 했다. 스웨덴 전통 민요와의 유사성은 그가 한국 밴드 음악을 찾는 또 다른 이유. 단조의 선율에서 풍겨지는 특유의 멜랑콜리.  
 
“한국 7080 포크송도 그런 느낌 있잖아요? ‘해봐롸기(해바라기)’ 같은. 그것이 현대 한국 인디씬까지 흘러온 것 같아요. 물론 그런 팀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린드그렌은 최근 세계적으로 거센 케이팝 열풍에 대해 남다른 시각도 갖고 있다. ‘1세대 아이돌’ 팬이었던 그 역시 스스로를 ‘빠순이’였다고 지칭했다. “H.O.T 때부터 케이팝은 팬덤을 지닌 음악이었던 것 같아요. 귀에 팍팍 꽂히는 멜로디와 예쁜 뮤직비디오가 시선을 끄는 ‘특정 장르’죠. 케이팝 만으론 한국 대중음악 전체를 포괄할 순 없다 생각해요.”
 
인디풀ROK으로 한국 록 음악 ‘전도사’ 역할을 한 지 11년. 시간이 흐르며 한국 음악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크라잉넛의 ‘말달리자’가 들끓던 홍대엔 십센치나 볼빨간사춘기 같은 말랑한 음악이 넘실거린다. “지금은 케이팝과 케이인디 두 영역에 걸친 ‘카페 스타일’ 팀들도 많은 것 같아요. 이들은 대중화되고 상업화되는 기술을 습득한 것 같아요.”
 
부산 출신 한국 록 밴드 세이수미가 오른 지난해 '코리아 스포트라이트 @SXSW' 무대. 세이수미는 잠비나이와 함께 해외에서 주목하고 있는 팀이다. 사진/한국콘텐츠진흥원
 
세계적으로는 유튜브와 스포티파이로 대표되는 ‘거대 플랫폼’이 음악적 질서를 새로 짜고 있다. 하루 걸러 새 싱글이 쏟아지는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의 시대. 하지만 왜 한국 인디는 좀처럼 열풍까지 되진 못할까. 한국 록의 세계화는 요원하기만 한 걸까. 
 
“록 음악 자체가 상업적 목표의 달성보단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음악이라 더 그런 것도 있죠. 그래도 해외 팬들은 최근 잠비나이, 세이수미 같은 팀에 점점 더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가 건넨 스마트폰엔 영국 싱어송라이터 코너 메이너드가 피처링한 숀의 ‘웨이 백 홈’이 8490만 스트리밍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스톡홀름의 한 카페에 앉아 있는데 이 노래가 나오더군요. 찾아보니 스포티파이의 자체 추천리스트에 오르면서 유명해진 거였어요.”
 
그는 ‘거대 플랫폼’이 독식하는 이런 환경이 한편으론 우려가 된다고도 덧붙였다. “이젠 음악을 적극적으로 찾아 듣는 환경이 아니잖아요. 저처럼 한국 음악에 열성적인 사람이 적어질까 걱정되죠. 한국의 록 음악이 세계로 더 알려져야 되는데 말이죠.”
 
린드그렌은 최근 구글 스웨덴에 입사했다. 회사 일로 전처럼 인디풀ROK을 열성적으로 하진 못하지만 한국 록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 
 
해마다 이 기간 그는 한국을 찾는다. 홍대가 들썩이는 ‘잔다리 뮤직 페스타’를 보기 위해서다. 올해는 온 김에 뮤지션들이 직접 레코드를 파는 ‘오픈레코드’, 고척돔에서 열린 H.O.T. 콘서트도 다녀왔다. 여성재즈밴드 플레이걸스, 90년대 스타일로 나온 프로젝트 인디 걸그룹 치스비치는 최근 그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팀이다. 
 
“이따 잔다리 가나요? 난 쑤다선(쓰다선), 보쑤동쿨럴(보수동쿨러), 컨나무(권나무), 백켠진(백현진)볼 거예요.” ‘자기 표현적’ 한국 록에 푹 빠진 그가 말했다. 가을날 햇살에 부서진 미소가 그의 푸른 눈과 함께 반짝였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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