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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레인맨, 초원이, 그리고 그레타
2019-09-27 06:00:00 2019-09-27 06:00:00
"문소리, 더스틴 호프만, 조승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찾아 헤매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최고의 배우다. 오아시스(2002), 레인맨(1988), 말아톤(2005)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의 역할을 기가 막히게 연기하면서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오아시스로 시애틀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문소리가 가족의 탄생(2006)으로 다시 데살로니카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을 때 기자들끼리 "저 여배우가 언제 병을 치료받았냐?"라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기자들이 문소리의 행동이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탁월했다. 문소리는 몸이 뒤틀리는 연기를 했다. 그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를 보는 관객의 시선도 당연히 불편했다. 그러니 장애인 자신은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이창동 감독은 이런 시선을 극복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현실의 장애와 편견을 뛰어넘어선 가슴 뭉클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 이창동 감독마저 장애인에 대한 편견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그런 면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단지 한 발짝씩 전진하는 것이다.
 
더스틴 호프만과 조승우는 상대적으로(!) 편한 연기를 했다. 두 사람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가 있는 사람의 역할을 했다. 더스틴 호프만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로 암기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레인맨을 연기했다. 그는 이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전 세계 관객은 자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모든 ASD 보유자들이 천재는 아니다. 조승우는 '백만 불짜리 다리'를 가진 마라토너 초원이를 연기했다. 초원이는 손을 휘젓고 소리를 지르고 까치발로 걷는 이상한 동작을 한다. 
 
영화의 힘은 위대하다. 우리는 ASD 아동이나 성인을 조금 특별하고 독특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개인이 변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행히 2015년 11월부터 발달장애인법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내민 한 걸음은 때로는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영화에서 맛본 감동의 약발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ASD의 S가 스펙트럼의 약자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폐증은 하나가 아니다. 많은 경우 어렸을 때부터 전형적인 자폐 특성을 보여서 치료와 교육을 시작하지만 때로는 언어발달이 거의 정상에 가깝고 자폐적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오히려 언어 능력이 보통 또래들보다 뛰어나서 복잡한 표현을 할 수 있고, 다른 아이들과의 놀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부모와 사회의 개입이 늦어진다. 소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하는 사례다.
 
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하는 이들 역시 다른 자폐인들처럼 집착 성향이 있다. 하지만 특정 사물이나 주제에 집착하는 일반 자폐인과 달리 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한 사람들은 천문, 역사, 지리, 인문 등 지적인 영역에 대한 집착 성향을 보인다. 또래들보다 뛰어난 언어 능력과 함께 깊고 넓은 지식을 지녀 '꼬마 교수'라는 별명이 따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칭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보다 자신이 뒤처진 것 같다는 불편함에서 유발된 조롱이기도 하다. 
 
지난 주 전 세계 시민은 각 도시에서 기후 파업을 벌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기후위기 비상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서울에서도 5000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 여기에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ESC) 소속 과학자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기후 위기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전 세계적인 시위를 촉발한 이는 놀랍게도 열여섯 살의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였다. 노벨평화상 후보자로도 거론되는 소녀에 대한 온갖 험담과 가짜 뉴스가 떠돈다. 하지만 어린 소녀는 훨씬 어른스럽게 대응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 증상을 가지고 나를 조롱합니다. 하지만요, 아스퍼거는 질병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한 내가 혼자의 힘으로 이 자리에 섰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내가 이 일을 해낸 것은 내가 아스퍼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상'이고 사회적이라면 어떤 조직에 가입하거나 스스로 조직을 만들었겠죠. 하지만 난 별로 사회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해낸 것입니다."
 
유엔본부에서 트럼프를 쏘아보는 그레타의 사진이 전 세계에 퍼지자 트럼프는 그레타의 운동을 '어린 소녀의 희망'으로 치부했다. 그레타는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저는 밝고 멋진 미래를 갈망하는 매우 행복한 어린 소녀입니다." 아스퍼거는 위대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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