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21화)정전시대의 군사적 그림자
“연대 기합 잘 주던 선생”
입력 : 2019-03-04 06:00:00 수정 : 2019-03-04 06:00:00
갈 길이 멀고 험해 보인다. 온 국민의 귀와 눈이 쏠렸던 제2차 북미회담이 충격적인 결말로 끝난 후 많은 이들이 실망과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쾌재를 부른 이들도 있었으리라. 이미 준비되어 있던 합의문을 엎어버린 회담 결과의 원인 분석에 분분했던 언론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이 사건(!)의 중심 배경에 미국내 정치 상황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자신의 옛 개인변호사 마이클 코언의 하원 청문회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이 북미회담을 좌우하는 현실, 강대국의 입김에 한반도의 미래가 흔들리는 역사가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 이틀째였던 지난달 28일 베트남 JW메리어트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뉴시스
 
하노이 북미회담을 돌아보며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회담의 첫날(2월27일) 국내 언론들은 미국의 뉴스웹사이트 복스(Vox)의 2월26일자 기사에 실린 북미간 잠정합의문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상징적 의미의 평화선언, 미군 유해 추가 송환, 북미간 연락사무소 설치,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서 핵폭탄 물질 생산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은 남북이 경협을 추진할 수 있도록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일부를 해제(lift)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런데 26일 복스의 이 기사 옆에는 다른 기사도 실렸는데,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인 문정인 교수가 같은 날 워싱턴DC 한미경제연구소의 간담회에서 한 발언을 전하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간담회의 사회자가 복스 보도의 잠정합의안에 대한 의견을 묻자 문특보가 “미국에게는 나쁜 딜이다”라고 했다는 것인데, 유튜브에 올라온 간담회 중계 영상을 보면 “북한에게는 너무 좋은(too good) 딜이고 미국에게는 나쁜 딜이다. 그런 딜이 하노이에서 이뤄진다면 다음날 사람들이 ‘승리자는 북한, 패배자는 미국’이라고 말할 것이다.”라는 말을 실제로 했다(손짓상 그렇게 말할 주체로 언론을 함축하는 듯하다).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인 문정인 교수. 사진/뉴시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한 것이겠으나, 발언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고 그간 그가 제시해 온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에 공감한다 할지라도, 북미회담을 하루 앞둔 초긴장 상태의 정세 속에서 그러한 발언은 현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복스는 당장 “‘미국에게는 나쁜 딜’: 남한의 최고 관리가 트럼프-김정은의 잠정협정을 거부하다”(“A bad deal for the United States”: top South Korean official rejects tentative Trump-Kim pact)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뽑았다. 복스의 기자가 다음날인 27일 기사를 업그레이드 하면서 문정인 특보의 이메일 답변을 보충하고 간담회 사회자의 질문이 영변 핵시설 폐기가 아닌 핵연료 생산 동결이었음을 반영해 기사를 정정했다는 코멘트를 달았지만, 문특보의 발언은 복스에 의해 “쇼킹”하고 “놀라움 이상”이며 잠정합의안(대략적인 개요)을 “엉망으로 만들었다”(trashed the general outline)고 표현되었다.
 
그런데 복스가 잠정합의안을 보도하면서 네 번째 사항 끝부분에 영변 외의 다른 핵시설도 딜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점, 이 잠정합의안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점은, 잠정합의안을 알려준 미국측 소식통이 그와 동시에 이 딜의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과 이번 회담이 결렬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남북한 국민들로서는 한반도의 절박한 미래이니 설레며 기대를 했지만, 미국 언론이 보여 온 회의적 태도나 미국내 정세를 볼 때 이번 회담의 전개과정과 결론은 이미 큰 틀 안에서 계획되어 있었던 게 아닐는지.
 
베트남 시민들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을 기념하는 티셔츠를 팔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베트남, 그리고 민방위 훈련
 
제2차 북미회담이 진행된 베트남은 과거와 현재 속에서 우리와 밀접하게 얽혀 만감을 교차시킨다. 회담이 잘 끝나 베트남도 싱가포르처럼 글로벌 광고 효과를 누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르게 되었던 우리의 과거사에 대한 사죄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전이 1975년 베트남 전역의 공산화로 끝나면서 그해 대한민국에는 위기감 속에 민방위대가 창설되었다(9월 22일). 사실 그 이전에도 1971년 12월 31일 대통령령으로 ‘방공·소방의 날’이 만들어지고 1972년 1월 제1차 ‘민방공·소방의 날’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지만, 1975년 ‘민방공’이라는 용어가 ‘민방위’로 바뀌고 법도 개정되어 ‘민방위의 날에 관한 규정’(6월 27일 대통령령)과 ‘민방위기본법’(7월 25일)이 제정·공포된다.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은 조선의 쌀을 일본에 바친 대신
베트남의 안남미
후후 불면
날아갈 안남미 배급 타
허기 메웠다

그런 베트남과의 관계 지나
박정희는
미국의 월남전
온 세계의 비판과 항의를 받을 때
그 미국과 뜻이 맞아
한국군을 보냈다

어떤 사람은 한국경제를 월남경기로 키웠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었다고 외치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월남은 그 이래로 한국의 행복한 외부가 아니라
불우한 내부였다

< … >
(호지명, 15권)
 
민방위대가 창설되면서 ‘예비군 훈련을 마친 현역이나 보충역 필인 자, 혹은 제2 국민역’을 마친 20세부터 50세까지의 모든 대한민국 남성들이 1년에 수차례 민방위 훈련에 참석해야 했고, 매달 15일은 전 국민이 공습경보·경계경보에 맞춰 대피훈련을 하는 날이 되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었다. 길을 걷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골목길 남의 집 대문 옆에 붙어 서있던 시민들, 학교에서 책상 밑으로 들어가거나 복도에 줄 맞춰 쪼그리고 앉아 있던 학생들, 혹은 지시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층계를 내려가던 모습들 모두가 이 시절의 풍경이다. 밤에는 등화관제 훈련을 실시해 전등도 텔레비전도 껐는데, 불빛이 새어나가면 골목에서 훈련관계자가 ‘불 끄세요!’라고 소리치던 시절, 숙제를 못해 기다리다가 잠들기도 하고 인공적인 불빛 대신 별빛을 감상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전협정이 긴 휴전이 되고 군사독재정권의 ‘반공교육’이 민주화시대를 지나면서 ‘통일안보교육’(1989년), ‘통일교육’(1994년)으로 변해가는 동안, 세월과 함께 민방위대 구성원의 연령도 조금씩 단축되고 교육시간도 차츰 줄어들었다. 고등학교 교련 수업에서 군사훈련이 빠지고 안보교육만 남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수정된 교련 교과의 교육과정이 1994년부터 적용되었다. 
 
교련·문무대·전방입소훈련
 
나이 든 세대라면 1980년대 중·후반까지 건재했던 반공, 멸공, 승공 같은 표어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승만 이래 반공이 국시가 되어 학교교육을 지배하고 국가보안법이 횡행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교련’ 과목이 만들어졌다.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1969년 필수과목이 되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말과 한국 전쟁 시기에도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징발되고 군사훈련을 받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련 시간에 남학생은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익히고 여학생은 삼각건·압박붕대 매기 같은 구급처치를 연습했다. 교련 교사는 주로 군 장교 출신이었고 여학교의 경우 군인 출신 외에 간호학교 출신도 있었다. 
 
중학교 교련교관이던 배속장교 김진강 선생
출석부로 지휘봉으로
아이들 때려 코피도 흘리게 하고
연대 기합 잘 주던 선생
6·25 지난 뒤 실성해서
거지 행색으로 중앙로 걸어간다
혼자 중얼거리며
옛 제자들 몰라보고 인사한다
< … >
아무나 보고 인사한다

바라노니 아무나 보고 인사함이 사람의 예절이기를
(‘김진강’, 7권)
 
1970~80년대 추억의 물품 전시회에서 한 청년이 당시의 상징과도 같았던 교련복을 입고 통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고등학교 교련은 1994년부터 군사훈련이 사라진 뒤 1997년 선택과목으로 전환되면서 선택하는 학교가 줄자 사실상 퇴출되었고, 2011년 ‘안전과 건강’(2014년에 폐지)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완전히 폐지된다. 한편, 대학 교련은 1988년 말에 폐지되었는데, 당시의 남자대학생들은 교련 수업 외에도 1학년 때는 문무대(육군학생군사학교의 별칭), 2학년 때는 전방입소교육을 가야 했다. 1·2학년 동안의 교련 수업, 문무대와 전방입소훈련의 대가로 80년대 대학생들은 현역 복무기간 30개월에서 3개월을 단축받았다. 그러나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들에게 독재정권의 통제수단인 캠퍼스의 군사교육은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이었고 이 일련의 과정은 결국 1986년 전방입소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서 반제와 반전반핵, 평화를 외치던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과 죽음을 낳았다. 
 
봄이 와서
4·19묘지에서 서울대 대표로 성명서 읽던 사람

그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로
숯덩어리로
전신 60프로 3도 화상의 송장으로 달려가며
양키를 태우고
파쇼를 태워버린 사람
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
그와 함께
매판을 태워버린 사람
서울대 반전반핵투쟁위원장 이재호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말로
< … >
이 땅을 하나로 세우리라
둘이서 하나의 내일 어기영차 들어올리리라
(‘김세진’, 별편)
 
강제징집과 숱한 의문사를 낳은 분단국의 군대,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던 대한민국의 중·장년들, 그리고 아직도 청춘의 한 시기 군복무에 헌신해야 하는 이땅의 청년들이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오려면 앞으로 얼마의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한 것일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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