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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전두환과 모리스 파퐁
2019-01-29 06:00:00 2019-01-29 06:00:00
우리의 슬픈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여전히 친일파들은 건재하고 그들이 누렸던 부귀영화는 이어진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의혹’들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1980년 당시 광주시민들은 온갖 루머 속에서 국가전복세력으로 몰려 처참히 학살됐다. 그 진실이 이제야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발포명령을 내린 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사료 공개가 그 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자기 남편이 ‘민주주의의 아버지’였다는 망언으로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법정에 나와 진술해야 할 전 전 대통령은 출두를 거부하고 있다. 알츠하이머 투병으로 인해 법정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을 우롱해도 유분수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긴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사실이라면, 한 치의 반성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리라.
 
어떤 일이 있어도 전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그리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모두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전직 대통령이었으니까’ ‘건강이 좋지 않으니까’ 등의 이유로 그를 동정하고 연민하는 건 금물이다.
 
전 전 대통령 소식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이다. 파퐁은 96세에 치욕스럽게 생을 마감한 프랑스 고위 공무원이자 정치인이다. 32세(1942년)에 지롱드(Gironde) 도청 사무국장이 된 그는 코르시카와 알제리 도지사, 파리경찰청 사무국장, 모로코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1961년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은 파리 경찰청장이었던 파퐁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그 이후로도 파퐁은 승승장구했다. 15년 간 그래츠 아르맹 빌리에(Gretz-Armainvilliers)와 생 아망 몽트롱(Saint-Amand-Montrond)의 시장, 13년간 쉐르(Cher) 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8년 발레리 지스카르 대통령은 68세인 그를 예산담당장관에 임명했다. 이처럼 프랑스 현대사의 한 축을 장식하고 온갖 권력을 풍미했던 파퐁이 1998년 반인류적 범죄자로 처단됐다.
 
왜 그랬을까. 1981년 대선 당시 프랑스 풍자 주간지 카나르 앙세네(Canard enchaine)는 파퐁이 지롱드 도청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1942-44) 보르도(Bordeaux) 지역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두 개의 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들은 미셸 베르제스(Michel Berges)라는 한 대학생이 지롱드 도청 아카이브 보관실에서 연구자료를 찾던 중 발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파퐁은 18년 간 법적투쟁을 벌였고, 결국 1998년 10년형을 받아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그는 거동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돼 2002년 석방됐고, 2007년 파리 교외의 한 병원에서 96세로 생을 마감했다.
 
파퐁은 자신의 시신을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은 레지옹 도뇌르 십자훈장과 함께 묻어 달라고 그의 변호사인 프랑시스 뷔이맹(Francis Vuillemin)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이 훈장은 그가 1998년 형을 언도받았을 때 더 이상 몸에 착용할 수 없게 됐다. 프랑스 사회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뷔이맹 변호사는 “훈장의 불법 착용은 공공장소에서만 범법이다. 무덤은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주검은 더 이상 귄리소유자가 아니다. 위법이 아니다”라고 로이터 통신에 밝히고 레지옹 도뇌르와 함께 묻어줬다. 이에 대해 또 다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그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미셸 알리오 마리(Michel Alliot-Marie)는 라디오 방송 <유럽 1>과의 인터뷰에서 “공화국은 공화국이 해야 할 일을 모두 했다. 소송이 있었고 사법부는 모리스 파퐁의 레지옹 도뇌르 십자훈장을 취소한다고 결정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더 이상 없다. 이제 그 얘기는 다시 듣기 싫다. 관을 여는 것은 불쾌하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파퐁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프랑스는 독일 나치에 가담한 자를 끝까지 추적해 색출해 낸다”는 말이 단순히 루머가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어떤 성역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포명령 책임자로 거론되는 전 전 대통령을 꼭 법정에 세워야 하는 이유다. 한 번 감옥에 갔다 왔으니 면죄부를 주자는 논리가 통용되는 한 역사는 절대 바로 설 수 없다.
 
우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를 좀 더 철저히 조명했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촛불혁명’이라는 말이 우리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소모전을 없애고 공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거 청산을 제대로 이뤄야 한다. 전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 할 이유다. 그래야만 희생된 영혼의 넋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다. 우매한 역사의 쇠사슬을 끊어내려면 보다 냉철한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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