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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후흑의 시대
2019-01-29 06:00:00 2019-01-29 06:00:00
서명수 슈퍼차이나 대표
중국 춘절경제가 시작됐다. 설 연휴를 전후한 보름여의 기간은 중국 전역이 춘절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농민공’(農民工)'들의 귀성행렬로 인산인해다. 춘절을 전후한 중국인들의 소비는 경제성장에도 적잖은 활력을 주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전쟁과 세계적 경기침체에 따른 중국경제의 하강 기조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중국경제는 여전히 견실해 보였다. 그들은 오히려 이웃나라 한국을 걱정했다. 중국인들은 한국을 경쟁상대로 조차 여기지 않는 듯했다.

중국 곳곳에서 만난 라오바이싱(老百姓, 일반서민)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소박한 기대를 표하곤 했다. 춘절을 맞아 아예 모처럼의 휴가를 얻어 타이항산 여행에 나선 한 중국인은 휴대폰 케이스에 '나는 돈을 버는 것을 좋아한다'는 문구를 새겨놓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하는 게 한국에서는 경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는 부자는 존중을 받는다. 반면 한국의 부자들은 끊임없이 검증을 받는다. 중국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 미덕이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마음속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지만 겉으로는 부자를 경멸하는 '후흑(厚黑)'의 미덕이 대세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중국에 머물며 바다 건너에서는 연이어 터져 나오는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후흑의 시대로 접어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공하는 중국인의 처세술로 잘 알려진 '후흑학(厚黑學)'은 권력을 잡고 성공하려면 얼굴이 두껍고 뻔뻔하고 마음이 음험해야 한다는 철면피의 철학이다. 이것은 20세기 초반 이쭝우(李宗吾)가 중국인이 갖춰야 할 처세술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후흑학을 알게 되는 사람은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했다.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밴 사람만이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속이는 줄 모르고 자신의 처세술이 후흑학인지도 모르는 사람만이 최고의 후흑학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 목포 근대문화거리의 부동산을 집중 매입해서 공직자의 이해충돌 및 투기논란을 불러일으킨 손혜원 의원이 생각났다. 중국에서라면 선의라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논란을 사과하거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손 의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다. 이런 후흑에도 단계가 있다. 1단계가 성벽처럼 단단한 얼굴을 하고 석탄처럼 검은 마음을 갖는 것이라면 2단계는 얼굴이 두꺼우면서도 강하게, 속이 검으면서도 겉은 빛나게 하는 것이다. 3단계는 얼굴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이 검으면서도 색깔이 없게 보이는 것이고 한다. 이 3단계를 거친 최고의 경지는 '불후불흑(不厚不黑)'이다. 얼굴이 두껍고 속이 음흉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인의와 도덕을 갖춘 성인군자로 여기게 된다. 겉과 속이 모두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그는 정의롭고 개혁적인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지경까지 도달하게 된다.

후흑의 경지에 이르려면 9가지 기본적 강령이 있다. 위기에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고 말과 글로 허장성세를 하고 사람을 가려 때에 맞게 아첨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남이 아무리 비웃거나 헐뜯어도 못 들은 척 하라는 등이 그것이다. 후흑의 대가는 한고제 유방이다. 그는 항우가 자신의 부친을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오히려 그 국을 한사발 달라고 했다. 건국 일등공신인 한신의 힘이 세지자 그를 경계해 죽였으면서도 선량하고 인자한 황제인 척 했다.
 
후흑학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선하게 사용한다면 선인이 되고 악하게 사용하면 악인이 된다. 후흑의 경지로 봤을 때는 손 의원의 사례는 최고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그의 행위를 선의로 믿어주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해야 경지에 오른 고수다. 스스로를 속이는 경지에 올라야 하는데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을 탈당하고 여러 차례 언론에 해명하는 것을 보면, 더 귀를 닫고 뻔뻔해야 한다는 후흑의 관점에서는 한참이나 멀었다.

전당대회를 앞둔 야당에서도 후흑학을 실천해나가고 있는 정치인들이 꽤나 등장하고 있다. 스스로의 결격사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당당해지려는 황교안 전 총리나 홍준표 전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은 후흑의 초보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멀었다. 가장 뻔뻔하고 음흉한 철면피가 되는 후흑의 단계를 섭렵하는 자만이 삼국지의 영웅 유비와 조조, 손권 같은 후흑학의 대가 반열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후흑의 시대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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