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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철새, 텃새, 나그네새
2019-01-25 06:00:00 2019-01-25 06:00:00
남한에 표준어가 있다면 북한에는 문화어가 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과 문법과 어휘, 그리고 철자법을 엄격하게 규범한 평양말을 각각 일컫는다. 서울말이나 평양말이 아니면 사투리 취급하는 꼴이니 두 곳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사뭇 불쾌하나 어쩔 수 없다. 이미 너무 오래 썼다. 서울말과 평양말이 다르니 당연히 표준어와 문화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장차 통일되면 표준어나 문화어 같은 개념은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 각자 편한 대로 말 좀 편하게 하자. 어차피 다 통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말은 스스로 적응하면서 진화해 왔다. 스스로 개척해 온 것이다. 그런 말을 법이 규정하고 보호하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계절조’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처음 듣는 사람도 금방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 계절에 따라 사는 곳을 바꾸는 새를 뜻하는 문화어다. 표준어에서는 철새라고 한다. 계절조와 철새에 짝을 이루는 문화어와 표준어는 각각 사철새와 텃새다. 표준어의 철새-텃새는 짧고 각운이 맞는 데 비해 문화어의 계절조-사철새는 길고 각운이 맞지 않는다. 통일되면 보존하려고 맘먹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말이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한 중위도 지방에 있는 데다가 대륙과 대양이 맞닿은 곳이어서 철새를 관찰하기 좋은 곳이다. 겨울철새는 번식하러 온다. 더 북쪽에 살다가 따뜻하고 먹이가 많은 남쪽에 와서 겨울을 나고 번식을 한 후 새끼를 키워 북쪽으로 돌아간다. 가창오리, 두루미, 흑기러기 같은 것들이다. 여름철새는 봄과 여름에 한반도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고 가을이 되면 따뜻한 남쪽에 가서 겨울을 지내는 새다. 긴꼬리딱새, 백로, 청호반새, 팔색조 등이 있다. 
 
철새와 달리 텃새는 계절에 따라 이동하지 않고 사시사철 일 년 내내, 아니 평생 한반도를 떠나지 않고 머문다(고 여겨진다). 참새, 까치, 직박구리,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뱁새), 곤줄박이 등이다. 먼 곳을 힘들여 여행하느니 어떻게든 한 곳에 머물면서 사철을 견뎌내는 방향으로 적응하는 데 성공한 새다. 그런데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게 힘들까, 아니면 사계절을 온전히 견디는 게 힘들까? 이건 질문을 달리 해보면 알 수 있다.
 
철새가 많을까, 텃새가 많을까? 우리나라에서 관찰되는 새는 아종을 포함해서 590종 쯤 된다(한반도에 사는 포유류가 127종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은 것이다). 이 가운데 여름철새는 60여 종으로 10퍼센트에 불과하다(여름에 철새 관광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겨울철새는 140여 종으로 24퍼센트나 차지한다. 여름철새와 겨울철새가 한반도에서 관찰되는 새 종수의 3분의1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3분의2는 텃새일까? 텃새가 많다보니 텃세 좀 부릴 수 있는 걸까? 놀랍게도 텃새는 70여 종으로 12퍼센트에 불과하다. 
 
10+24+12=46. 철새와 텃새가 46퍼센트다. 그렇다면 나머지 54퍼센트는 뭐란 말인가? 철새와 텃새 말고도 나그네새가 있다. 문화어로는 려조(旅鳥)라고 한다. 그냥 우리나라를 스쳐 지나가는 새다.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다. 많은 산새, 그리고 도요새, 물떼새가 여기에 해당한다. 모두 160여 종으로 전체의 27퍼센트를 차지한다. 철새와 나그네새의 차이는 여기서 알을 낳느냐 마느냐다. 그래도 남는 27퍼센트는 길 잃은 새다. 종 수로는 27퍼센트나 되지만 개체 수는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급격한 기후 변화로 길 잃은 새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텃새보다 철새가 훨씬 종수가 많다는 것은 이동에 힘이 들어도 맞는 환경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뜻일 것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텃새라고 하더라도 같은 지역에 1년 내내 머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만 굳이 계절을 따지지 않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철새에 대한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철새나 텃새나 모두 우리나라에서 알을 낳고 번식한다. 철새나 텃새 모두 한반도가 고향인 것이다. 철새든 텃새든 한반도에서 후손을 남기고 한반도 생태계의 유전자 풀(pool)을 다양하게 만든다. 
 
철새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고향은 같다. 옮겨 다니기는 해도 어떻든 뭔가 성과를 내고 있다. 문제는 나그네 정치인과 길 잃은 정치인이다. 목적도 없이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 정치하는 사람, 어디가 길인지 모르고 헤매기만 하는 정치인이 문제다. 정작 욕은 철새만 먹는다. 텃새도 옮겨 다닌다. 우리는 나그네 정치인에게 너무 관대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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