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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탈 코르셋, 꾸미지 않을 자유
2018-09-17 08:00:00 2018-09-17 08:00:00
얼마 전 어깨 아래까지 늘어지던 긴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왕 짧게 자를 거 아예 투블럭 숏컷으로 자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짧아진 머리로 미용실을 나오니 시원하고 산뜻한 느낌이 좋았다. 이튿날 책 구경을 할 겸 동네 서점에 들렀다. 한참 만화책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뒤쪽에서 한 커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가까운 거리라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자기야, 나도 저 여자처럼 투블럭 해 볼까?"
"아냐, 난 여자가 저런 거 싫어."
 
들으려고 해서 들은 얘기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가 말한 "여자가 저런 것"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최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신을 꾸미는 비자발적 행위에서 벗어나는 탈코르셋 운동이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른바 '탈코'는 여성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화장, 치마, 긴 머리 등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친구들은 짧게 자른 내 머리를 보고 '탈코'한 거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맞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긴 머리는 너무 불편했고, 예뻐 보이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잘라버렸다.
 
불편했던 긴 머리처럼, 내가 그간 차고 있었던 '코르셋'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나의 꾸밈노동이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었는지, 그 꾸밈노동이 나를 얼마나 억압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말이다.
 
삶의 일부였던 코르셋에 대하여
 
나는 고등학교 때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홧김에 머리카락을 자른 것을 제외하고는 항상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친구들도 다 긴 머리를 하고 있었고, TV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도 대부분 긴 머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자라면 보통 머리가 길어야지' 하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옷을 말하자면 가끔 사복을 입을 때를 빼면 항상 여학생용 교복을 입었다. 교복치마는 신축성이 없고,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뛰어다니기도 불편했다. 여학생용 블라우스는 몸에 지나치게 딱 맞고 짧아서 활동하기가 힘들었다. 편함을 위해 체육복이나 남학생용 교복을 입는 여학생들은 혼이 났다. 이유는 대부분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해서'였다.
 
학창시절 주니어네이버에 있던 슈게임을 종종 했다. 아바타 스타인 슈가 남자친구인 빈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 옷을 고르고 평가받는 게임, TV 쇼에 나가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게임 등등이 인기를 끌었다. 나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예쁜 아바타 스타 슈를 만들려고 열심히 게임을 했다. 못생기고 뚱뚱하고, 옷을 못 입는 아바타는 낮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화장을 시작했다. '풀 메이크업'의 단계는 꽤 복잡했다. 얼굴에 컨실러, 파운데이션, 아이라인, 아이섀도, 블러셔까지 얹고 나면 삼사십 분이 훌쩍 지나는 것은 다반사였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새 옷도 필요했다. 학생들이 자주 찾는 지하상가에는 테니스 스커트나 청반바지처럼 요즘 유행하는 옷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런 매장에서 파는 옷들은 대부분 '프리 사이즈'라 했다.
 
그러나 분명 프리 사이즈라던 그 옷들은 내게 맞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런 예쁜 옷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했다. 결국 나도 살을 빼서 짧은 치마와 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런 옷들을 입으면 계단을 올라갈 때도 힘들고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옷을 입고 정성스레 화장을 한 여자들을 보고 "예쁘다"고 해 주었다. 사람들은 예쁜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예쁜 여자가 되려고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했다. 
 
그런데 점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늘 파운데이션으로 덮고 다닌 피부에는 빨간 반점이 생겼다. 처음엔 뾰루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굴 피부 전체로 퍼졌고, 눈꺼풀에는 수포처럼 생긴 것들이 돋아났다. 몇 차례 화장품 종류를 바꿔 보았지만 헛수고였고, 피부 상태는 더 악화됐다. 늘 몸을 꽉 조이는 바지를 입었더니 질염에 걸렸다는 진찰도 받았다. 결국 나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다녀야만 했다.
 
건강에 대한 스트레스로 힘들어할 무렵 인터넷을 하다가 탈코르셋이라는 단어를 접했다. 물론 코르셋이 중세시대에 여성들이 체형 보정을 목적으로 입던 속옷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현대판 코르셋은 좀 더 확장된 의미로, 여성에게 강요되는 각종 꾸밈노동이다. 탈코르셋은 그 현대판 코르셋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번뜩 '나도 그동안 코르셋을 차고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옷장을 둘러봤다. 신축성 없는 짧은 바지, 계단을 마음 놓고 올라가지 못하는 짧은 치마, 팔을 들 수 없는 오프숄더, 바람이 통하지 않는 스키니 진. 화장대에는 내 모공을 꾹 막아버리는 각종 색조 화장품들이 가득했다. 모두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구매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 많은 옷가지와 크레파스 같은 화장품들이 내 온몸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예쁘다는 이유로 내가 하고 입었던 그것들이 결국 현대판 코르셋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누군가 내게 정말 코르셋을 조여 맨 듯 헛구역질이 났다.
 
꾸미지 않을 자유
 
혹자는 애초에 꾸미고 꾸미지 않고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냐며 반문할 것이다. 물론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꾸밀 자유가 있다. 누구도 개인의 취향에 대해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우리의 취향이 정말로 우리가 온전히 원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오로지 예뻐지기 위한 화장과 옷, 신발과 머리. 그것이 정말 나를 위한 선택이었나? 수십 번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답은 "아니다"였다. 
 
대부분의 여성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옥죄는 것에 얼마나 쉽게 노출되는지. 아동용 사이즈에 가깝지만, '프리 사이즈'라는 태그를 달고 있는 옷들, 피부를 옥죄는 색조화장품이 우리에게 얼마나 '당연'한 것이었는지. 그것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 우리는 우리를 억압해 왔던 것들을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소비하고 마는지. 매일같이 '아름답고 예쁜' 여성에 대한 번쩍이는 환상을 심어주는 미디어를 접하면서 우리들은 그동안 여성성을 어떻게 규정해 왔는지. 그 고정적인 여성성에서 탈피한다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도 말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본인의 취향대로 꾸밀 자유가 있다. 그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 모든 사람은 우리 사회의 통념이 규정하는 아름다움에서 탈피하고, 꾸미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것 또한 당연하다.
 
나는 모든 사람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지고 있는 화장품을 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느껴졌던 사람이 있다면 그대들이 그 꾸밈노동을 벗어던져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대들의 모습이 이 사회가 말하는 '예쁜 사람'이 아니라 그대가 원하는 그대만의 자유로움이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현이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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