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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2화)집배원 이야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식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 했다”
2018-09-10 08:00:00 2018-09-10 08:00:00
리더십 강연자 마크 샌번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그의 책 <우체부 프레드>(원제: The Fred Factor)의 프레드는 저자가 출장으로 집을 여러 날 비우자 쌓인 우편물이 도둑을 부를까봐 그의 우편물을 보관해 주고, 택배 회사에서 다른 집에 잘못 배달한 저자의 소포를 찾아다가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곳에 도어매트로 덮어두는 집배원이다. 직업적 의무 이상의 일을 해내며 ‘사람’을 생각하는 그의 놀라운 배려에 대중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그가 장시간 초과근무와 오토바이 주행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였다면, 그래서 과로사와 사고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노동환경 속에 놓여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집배원의 이미지
 
인터넷이 없고 통신시설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전화기 있는 집이 드물고 급한 소식을 전보에 의존하던 시절, ‘우체부 아저씨’는 동네사람들에게 소식을 날라다주는 반가운 이웃이었고 일손과 말벗이 되어 준 존재이기도 했다. “아저씨 아저씨 우체부 아저씨 / 큰가방 메고서 어디 가세요 / < … > / 편지요 편지요 옳지옳지 왔구나 / 시집간 언니가 내일 온대요.” 195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동요 ‘우체부 아저씨’(정근 작사·작곡)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양산된 수많은 전쟁고아들과 이산가족들에게는 더욱 간절하게 다가갔을 법하다. 지금도 이 노래가 사랑받는 이유의 중심에는 반가운 소식의 전령이자 ‘정(情)’의 배달자로서 ‘우체부 아저씨’가 가진 따뜻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여담이지만, ‘우체부(집배원) 아저씨’, ‘소방관/경찰관/청소부(환경미화원) 아저씨’와 ‘의사 선생님’, ‘교수님’, ‘의원/판사/검사님’ 등의 호칭 속에 내포된 차별의식을 비판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국립세종도서관(1층 전시실)에서 열린‘한국 우정(郵政) 130주년 기록전시회’에 전시된 1962년 우체부 모습 사진 작품. 사진/뉴시스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우체부’라는 호칭이 비하적인 어감을 내포하고 있다하여 ‘집배원’으로 바뀌었지만, 사실 ‘집배원’이라는 호칭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들어와 일제강점기 때 공식적으로 사용된 호칭이기도 하다. 개화기인 1884년 근대 우편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사용된 호칭은 ‘체전부’로, 그 외에 체부, 분전원, 우체군으로 불리기도 했고 높임말로는 체주사, 체대감이란 별칭도 있었다고 한다. 
 
교장이 장차 뭐가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사내애들은 야마모또 이소로꾸 사령장관이 되겠다
노기 대장이 되겠다 했다
계집애들은 간호부가 되어서
남태평양 라바울전선 황군 부상병 치료해주겠다고 했다
교장이 나더러 물었을 때
나는 천황폐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자 날벼락이 떨어졌다
네 이놈 천황폐하라고?
감히 만세일계의 폐하를 모독하다니
네 이놈 당장 퇴학이다
< … >
그뒤로 교장이 또 물었을 때
나는 우편배달이 되겠다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식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 했다
나는 우편배달 아저씨와 편지를 좋아했다
나한테는 한 장도 오지 않지만
동네에 우편배달 자전거 오면 책 덮고 뒤따랐다
일년에 편지 스무 통쯤 올똥말똥
안뜸 다목이란 놈
동네 편지 방죽가에서 받아다가
다 뜯어보고
밑지로 쓰고 딱지 만들고 했다
떡 얻어먹으러 가서
떡 안 주는 집에 앙심 품고 있다가
그 집 편지 뜯어보고 찢어버리고 웃어댔다
일제시대 한동안
우리 동네는 편지 없이 두메산골 그대로 소식 없이
집 떠난 사람들 아무 소식 없이
죽었는가 살았는가 까막까막하다가
기어코 다목이 짓 들통나서
우편배달 파면당하고
다목이 주재소에 끌려가 열흘 만에 돌아왔다
내가 우편배달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새 우편배달부가 왔다 눈썹 없는 사람이었다
(‘편지’, 2권)
 
서울 종로구 광화문네거리 인근에서 우체국 집배원이 업무를 시작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과로사, 사고사에 위험수당 6만원
 
우편물의 운반수단이 도보에서 자전거로,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바뀌었고, 우편물은 사적인 손편지에서 각종 고지서, 심지어 우체국 택배상자들로 중심축이 옮겨지긴 했지만, 시골의 독거노인들에게 집배원은 여전히 반가운 말벗이고 때로는 일손이 되어준다. 그러나 2018년 대한민국 집배원의 현실은 농·어촌의 험한 지리적 조건 속에서 80∼100㎞를 오토바이로 달려야 하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하루에 1천 통 이상의 일반·등기우편물과 수십 개의 택배를 폭염·폭한 속에서 날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도 울고, 우리도 울었다. 어제(8.30) 거창우체국 소속 故 김병국 동지가 업무 수행 중 교통사고(트럭이 이륜차를 추돌)로 세상을 떠났다.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 없다.” 2018년 8월 31일자 전국우정노동조합이 낸 성명서의 시작 부분이다. 과로사, 사고사가 끊이지 않는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던져진 집배원들 중 또 한 명이 귀한 생명을 잃었다. 이들에게 강요된 과도한 업무 하중은 집배원들을 뇌출혈,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하고 차량추돌사고를 당하게 한다. 매년 발생하는 과로사와 안전사고뿐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최후의 절규도 있다. 2017년 7월 ‘장시간 중노동’ 환경 속에서 근무하다가 분신을 시도, 이틀 후 사망한 안양우체국의 원영호 집배원, 같은 해 9월 교통사고로 부상당한 상태에서 출근을 독촉 받자 “사람 취급 안하”는 현실을 유서에 고발하고 자살한 서광주우체국의 이길연 집배원을 기억한다. 
 
2018년 상반기 동안 사망한 집배원 수는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4명이다. 2018년 6월 16일~17일, 라돈침대를 생산하고 수거하지 않는 침대회사를 대신해 집배원들이 주말작업에 투입되었을 때, 첫날 작업에 참여하고 운동을 하다가 쓰러져 사망한 집배원의 월평균 초과 근무시간은 49.2시간, 하루 근무시간은 10시간 23분이었다. 한편, 전국우정노동조합이 2018년 5월 4일에 작성한 <2018년도 임금협약서>를 보면, “이륜차를 상시 운행하여 우편배달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한 달에 지급되는 위험근무수당은 6만원이고, 우정실무원과 특수지 계약집배원의 시급은 각각 7530원, 7250원이다.
 
현저히 부족한 인력으로 살인적인 초과근무에 시달리는 집배원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주 52시간 노동과 토요택배 폐지 노력이 일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혹여 토요택배의 ‘불완전한’ 폐지로 인해 ‘우체국 노동자’지만 우정사업본부 소속 집배원이 아니라 특수고용노동자인 위탁택배노동자들에게 토요택배의 업무가 전가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토요일에 택배를 못 받는다고 국민들에게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집배원들에게는 대규모 인력증원이 절박하고 절실하다. 피감기관 돈으로 ‘관광’ 해외출장을 가고 ‘특활비’를 남용하는 국회의원들의 눈 먼 돈은 이런 곳에 사용되어야 한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집배노동자 장시간 노동철폐 및 과로사·자살방지 시민사회 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집배노동자 장시간 노동철폐 및 과로사·자살방지 시민사회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사회단체 회원이 사망한 집배원 상징물을 우체통에 붙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3인의 집배원 이야기
 
이시중, 오기수, 차선우. 역사 속 세 명의 집배원 이야기가 있다. 우정박물관과 당시 신문보도들이 전해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전주우편국(현 전주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이시중(?~1926) 집배원은 1926년 7월 22일 전주군 우림면(현 전주시 평화동 2가) 일대로 우편물 배달을 나갔다. 그런데 홍수 때문에 개울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너지 못하게 되자 건너편 마을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편지를 돌에 매달아 던졌지만 줄이 끊어져 편지가 개울물에 떠내려가게 되었다. 이시중은 편지를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지만 급류에 휩쓸려 편지를 손에 쥔 채 익사하고 말았다. 우체국장과 주민들은 그의 시신이 걸려 있던 바위를 깎아 순직비를 만들어 대령사(현 전주시 고사동) 뜰에 세웠고, 이 순직비는 해방 후 전주우체국 뒤뜰에 옮겨졌다가 1973년 우정총국을 거쳐 2011년 천안의 우정공무원교육원으로 이전되었다. 
 
충남 서산군(현 태안군) 안면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오기수(1932~1980) 집배원은 1980년 12월 12일 저녁, 우체국에서 10km 떨어진 안면읍 신야리의 엄정한씨 집에 농민신문 한 부를 마지막으로 배달했다. 영하 15도의 눈보라가 치는 날씨라 엄씨가 자고 갈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다음날 새벽부터 돌려야 할 배달물이 있고 가족과 우체국 동료들이 기다린다고 하며 자전거를 타고 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결국 우체국에 이르지 못했고 다음날 아침 수색을 나온 동료들에 의해 11시경, 엄씨 집에서 400m쯤 떨어진 안면읍 중장리 해변 벼랑길에서 실족·추락해 동사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부인과 3남 3녀를 두고 순직한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장례비도 없었고 동네 주민들이 음식을 준비해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성금으로 만들어진 그의 추모비는 안면우체국 앞뜰에 세워졌다가 이후 천안으로 이전되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차선우(1982~2011) 집배원은 경기도 용인우체국 소속이었다. 2011년 7월 27일 폭우가 쏟아진 용인시 포곡읍 금어리에 마지막 8통의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동료집배원과 함께 나갔던 그는 도로에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자 오토바이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300m가량을 걸어가게 되었다. 흙탕물이라 바닥이 보이지 않아 물 속 배수관에 빠진 차선우 집배원은 한 손에 우편물 뭉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배수관을 잡은 채 버티다가 동료에게 우편물을 넘겼다. 우편물을 옆에 있는 철망 사이에 끼운 후 그를 잡고 구하려던 동료가 수압에 미끄러지면서 둘은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다. 다리 한쪽이 배수로에 빨려 들어갔던 동료는 이 광경을 보고 다가온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조되었으나 차선우 집배원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우편물을 포기하고 두 손으로 배수관을 잡아 버텼더라면...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숨 대신 등기우편물 6통과 국제특별운송우편물(EMS) 2통을 살리고 3일 뒤 60㎞ 떨어진 서울 청담대교 북단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시중, 오기수, 차선우. 다른 시대에 같은 사명감으로 자신을 희생했던 이들 3인 집배원들의 순직비, 추모비는 우정공무원교육원 추모공원에 함께 서 있다.
 
지난 1980년 12월12일 폭설 속에서도 우편물을 배달하고, 우체국으로 돌아오다 숨진 고 오기수 집배원의 30주기 추모식에서 집배원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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