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이정모의세상읽기)공포와 혐오의 결과는?
2018-08-31 06:00:00 2018-08-31 06:00:00
글루(glue)는 '접착제' 또는 '풀'이라는 뜻의 영어다. 누구나 쉽게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단어이다 보니 과학에서도 많이 가져다 쓴다. 글루온(gluon)이 대표적이다. 글루온은 쿼크끼리 결합시키는 입자다. 즉 쿼크와 쿼크를 이어주는 풀이라는 뜻이다. 입자인데 질량이 제로(0)다. 질량이 없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글루온이 없다면 원자핵도 없다. 이 세상에 아무런 원소도 없는 것이다. 우주는 텅 빈 공간에 불과하게 된다.
 
글루온이 아무리 중요한 입자라고 해봐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신 글루텐(gluten)이 유명하다. "저희는 글루텐이 들어 있지 않은 다양한 제품을 판매합니다." 인터넷 사전에서 글루텐이 들어있는 예문을 검색할 때 나오는 첫 번째 문장이다. 이 문장만 보면 글루텐은 뭔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큰일 날 물질 같다. 하지만 우리는 글루텐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글루텐은 보리와 밀 같은 곡류에 들어 있는 단백질이기 때문이다.
 
글루텐은 밀가루 특유의 쫄깃하고 찰진 식감을 만들어준다. 쫄깃한 떡볶이와 긴 국수는 글루텐 덕분에 가능한 식품이다. 글루텐은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배가 아파서 친구 약사에게 찾아가면 내게 글루텐을 피하라고 한다. 내가 살이 찌고 피부에 트러블이 생기는 것도 모두 글루텐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소화 장애를 일으키는 게 정말로 글루텐 때문일까? 실제로 글루텐 단백질을 처리할 수 있는 효소가 없어서 생기는 병이 있기는 하다. 셀리악병이 바로 그것. 이 병을 앓는 사람은 평생 글루텐을 섭취하면 안 된다. 조금만 먹어도 대단히 위험해진다. 그런데 나는 평생 글루텐을 섭취해 왔고 아직 심각한 위험 상태에 빠진 적이 없다. 적어도 나는 셀리악병 환자는 아닌 셈이다. 독일사람 가운데에는 무려 1퍼센트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셀리악병 진단 사례가 거의 없다. 독일에서도 글루텐에 대한 히스테리가 심하다. 글루텐을 먹지 말아야 하는 사람보다 열 배나 많은 사람들이 글루텐 프리 제품만 먹고 있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비만에 빠질 가능성이 크지만 그것은 글루텐 때문이 아니다. 쌀과 감자는 그냥 쪄서 먹지만 밀가루에는 설탕과 버터를 잔뜩 넣어서 도넛, 쿠키, 케이크를 만들어 먹기 때문이다.
 
내가 탄수화물 중독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쌀밥은 되는데 밀가루 음식은 피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글루텐 때문에 탄수화물에 중독되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분들이 있다. 글루텐이 위에 들어가서 위산에 있는 펩신 효소로 소화되면서 몸 바깥에서(exo) 만들어진 모르핀(morphine)이란 뜻의 엑소르핀(exorphine)이라는 물질로 변한다. 그런데 엑소르핀이 모르핀과 구조과 비슷해서 중독성을 유발한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어떤 성분이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들어있느냐가 중요하다. 밀가루 500그램을 먹으면 혈액 속에 엑소르핀이 0.7밀리그램 정도 들어갈 수 있다. 중독을 유발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엑소르핀은 비단 밀가루의 글루텐뿐만 아니라 우유의 카제인, 쌀과 달걀의 알부민, 혈액 속의 알부민과 헤모글로빈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 글루텐이 위장에서 마약으로 바뀐다면 쌀과 우유, 그리고 선짓국도 탄수화물 중독을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없다. 그냥 글루텐이 미워서 하는 이야기다.
 
글루텐에 대한 공포 또는 혐오의 결과는 두가지다. 공포와 혐오에 빠진 사람들의 경제적 손실 그리고 공포와 혐오를 유발한 사람들의 경제적 이득. 글루텐 프리 제품은 비싸다. 아이들에게 건강식품을 먹이고 싶은 사람은 필요 없이 과도한 경제적 지출을 해야 하고 덕분에 돈을 버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개연성에 따라 결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익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부분 안전한 선택을 선호하고 반대로 손실이 발생하고 있을 때는 좀 더 위험한 대안을 선택한다. 잘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고혈압 약 원료로 발암 가능 물질이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나오자 고혈압 약 복용을 즉시 멈춘 사람이 많았다. 그 안에 발암물질이 얼마나 들어 있고 어떤 영향이 끼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혈압 약 복용을 중단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빤한 데도 말이다.
 
공포와 혐오가 마구잡이로 퍼지면 우리는 그 공포와 혐오의 지배 속으로 들어간다. 쓸 데 없는 공포와 혐오의 혐의를 벗겨주는 것이야말로 정부와 언론, 그리고 전문가가 할 일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penguin1004@me.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