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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문명으로 읽는 기업)⑬조선과 다른 선택, 천하를 경영하라
2018-07-23 07:00:00 2018-07-23 07:00:00
구한말 조선이 몰락해 갈 때 이 땅에 와 있던 외국 공관 사절들에게 가장 희화화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고종이 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원구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500년간 황제국이 아니라 스스로 제후국으로 위상을 낮췄던 조선은 멸망 직전, 나라를 지킬 아무런 힘도 없을 때 뜬금없이 제국을 선포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외국인들의 눈에는 웃음거리가 됐다.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조선에서 청나라가 물러가고 일본이 주도권을 잡았다. 조선은 일본을 견제하려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냈지만 이를 빌미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고종은 황급히 러시아 대사관으로 숨어들었다. 아관파천이다. 궁색하기 이를 데 없어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에서 복귀하며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갔다. 경복궁보다 외교 공관들로 둘러싸인 덕수궁이 일본 군대나 자객의 위협으로부터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원세개 군대의 눈치를 보다가 청일전쟁이 끝나자 일본군의 위협을 느꼈다.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을 계기로 노골적으로 외세에 의존했으면서도 백성의 눈을 두려워해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에는 대한제국을 선언했다. 그는 조선이 제후국이 아니라 제국임을 만천하에 고했다. 태조도, 세종도, 조선 왕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이 조선에서 물러갔으니 500년 동안 눈치 보던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조선 건국 이후 처음으로 조선의 왕이 상제에게 직접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단행했다. 슬픈 대한제국의 개막이었다.

다섯개 발톱의 용에서 발톱 하나를 빼야 했던 조선
 
경복궁 사정전에 가면 운룡도가 그림으로 걸려 있다. 경복궁에서 가장 웅대한 정치적 공간은 근정전이지만, 실제 정치가 행해진 곳은 바로 뒤의 사정전이었다. 여기에 이제는 빛바랜 '운룡희주(雲龍戱珠)'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15세기나 16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재건할 당시 땅속에서 발견됐다. 이 그림은 용의 발톱이 4개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하는 운룡도를 그릴 때 용의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을 넣는다. 사람의 손가락이 5개 듯 황제를 상징하는 용도 발톱이 5개다. 반면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 왕실은 발톱 하나를 빼고 사조룡(四爪龍)으로 그렸다. 발톱 하나의 차이가 조선 왕실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한제국 이후 그려진 왕실 운룡도에는 칠조룡(七爪龍)이 등장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상징적 기형이다. 의인화된 용의 발톱이 7개라는 것은 정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은 발톱이 5개다. 반면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 왕실은 발톱을 하나 뺀 용을 그렸다. 제국임을 포기하고 제후를 자처한 조선 왕실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주의로 세계 질서를 주름잡으려 한다면 한국은 인류의 보편주의를 기반으로 글로벌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이 첫번째로 직면하는 역사적·철학적인 성찰은 바로 '조선과 다른 선택'을 고민하는 것이다. 사진/뉴스토마토
 
2018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10위의 경제대국이다. 영국의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2032년이 되면 한국이 중국과 미국, 인도, 일본, 브라질,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것도 통일 한국이 아니라 남한의 경제 규모만으로 예상한 것이다. 앞으로 30년 이후의 미래를 전략적으로 고민하는 '국가전략2050'은 'G-5, BL-10국가'를 제시했다. 세계 5대 경제강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삶의 질 기준(Better Life Index)' 10위권이 되겠다는 구상이다. 이 국가비전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과 문명의 충돌 속에서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바탕으로 세계 공익에 기여하고 21세기 문명적 전환을 주도한다는 계획을 바탕으로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1960~1970년대의 추격형 국가모델이 아니다. 창조적 상상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파트너십이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주의로 세계 질서를 주름잡으려 한다면 한국은 인류의 보편주의를 기반으로 글로벌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이 첫번째로 직면하는 역사적·철학적인 성찰은 바로 '조선과 다른 선택'을 고민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등 패권국가인 황제국을 중심에 두고 스스로를 낮추는 제후국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상상하고 국가전략을 펼치는 '평화의 제국'이 돼야 한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처럼 식민지를 수탈하는 강압적 국가가 아닌 인권과 민주, 평화의 가치와 철학에 기초를 둔 국가여야 한다. 이런 국가를 동아시아 문명의 고전인 <중용>에서는 '천하국가'로 표현했다. 동아시아 문명에서는 천하국가를 운영하는 제왕이 힘에 의한 패도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덕에 의한 왕도정치를 하라고 가르친다. 

21세기 글로벌 공동체 '천하국가' 정신을 담은 동아시아 문명론
 
동아시아 문명의 제왕학은 5000년 전 요순시대를 이상적 모델로 삼는데, 역설적으로 이는 21세기 보편주의에 기반한 국정운영 방식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제왕학의 교과서는 <대학연의>다. 동아시아 문명의 국정운영과 조직원리는 공자가 한차례 고전들을 편집했고, 남송의 주희가 기본 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의 재전제자(再傳弟子)인 진덕수는 이를 제왕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대학연의>를 군자의 특수론으로, 인식론적 기초로는 <중용>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고전은 이 책들을 중심으로 사서삼경이 재구성됐다. 동아시아 문명의 고전에는 21세기 일국체제를 넘어선 인류의 보편주의가 담겼다.
 
21세기는 과거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처럼 국가의 크기와 국력에 의해 차별받는 국제 질서가 아니라 인권과 민주, 평화의 보편가치로 공존을 모색하는 글로벌 공동체의 시대다. 공동체의 철학과 가치는 칸트의 영구 평화론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등 서양 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풍부하고 다양한 가치와 철학 그리고 역사적 사례들이 동아시아 문명론 속에 있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다. 2030년이 되면 세계 10대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들 중에서 5개국(한국,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이 아시아 국가가 될 전망이다. 그리고 이 국가들은 경제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정신과 철학적 사유에서도 아시아적인 가치를 심어낼 것이다.
 
동아시아 문명론은 국정운영과 글로벌 거버넌스뿐만 아니라 기업 영역에도 새로운 착상과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한국 대기업들은 이미 내수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 중이다. 삼성 등 몇몇 기업은 전자 등 일부 분야에서 이미 세계 1위의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할 때도 그 첫째 조건은 '조선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 한국 기업은 서구 기업을 모방하고 추격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더이상 이러한 추격형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기업들이 추격형 기업모델을 선택, 한국보다 임금 등으로 훨씬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은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추격형 기업을 넘어서는 새로운 글로벌 기업운영의 철학과 방법을 동아시아 문명에서 읽을 수 있다. 기업은 국가보다 급변하는 시장에 더 기민하게 대처해야 하는 조직이다. 동아시아 문명론에서 역동적인 변화를 읽는 방법은 <주역>에서 제시되어 있다. 64괘로 이뤄진 괘사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이 책은 동아시아 고전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난해하고, 변화무쌍하다. <주역>을 제왕학의 관점으로 해석한 학설이 벽괘설이다.

춘하추동의 우주적 변화로 보는 국가와 기업의 운명
 
<주역>에 따르면 자연에 춘하추동의 계절이 있듯 우주의 근본적 변화도 '원형이정(元亨利貞)'의 계절에 따라 변한다. 권력이나 기업도 1월부터 12월까지 계절을 따른 생애주기를 가진다. 봄에 할 일과 가을에 준비해야 할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봄에는 여름을 준비해서 크게 치고 나가야 하고, 가을로 접어들면 추위에 대비해야 한다. 한나라의 경방(京房)은 주역 64괘 중에서 60개를 중심으로 권력과 기업리더십의 계절 변화를 추이 한 벽괘설을 주창했다. 군주를 상징하는 벽(人 없는 僻)을 중심으로 공(公), 후(侯), 경(卿) 그리고 대부(大夫)의 5개 범주를 조합해 국정운영과 기업리더십에 지침을 제공했다.
 
사진/뉴스토마토
 
빈 물잔의 아래에서부터 물이 차오르는 6단계가 봄과 여름, 가을, 겨울로 변하는 계절적 추이를 겪으며 다양하게 변한다는 게 <주역>과 벽괘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대통령이나 기업리더십이 해야 할 정책과 기업운영의 지침, 조직의 상하가 공, 후, 경, 대부의 역할로서 각각 해야 하거나 주의할 일을 알려준다. 더 중요한 것은 한여름에 잘 될 때보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다시 봄을 준비하는 일이다. 빈 술잔에 물이 꽉 차 있는 절정의 시기에는 조금씩 어려움이 찾아온다. 이 변화를 여름에서 가을을 지나서 겨울로 보여주는 것이 <주역>의 가장 큰 묘미이다. 일이 잘될 때보다 잘 안될 때 경계를 하고 이에 잘 대비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것이 국정운영이나 기업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어려움을 겪어내야 사회적 신뢰와 평판, 명성이 생긴다. 
 
벽괘설은 12개월을 나타내는 12괘와 함께 음력에만 있는 윤달을 나타내기 위해 재윤괘(再閏卦)로 '중부괘(中孚卦)'와 '소과괘(小過卦)'를 다시 넣었다. 재윤괘는 음력에서 5년마다 두 번 돌아오는 윤달에 상응한다. 결과적으로 <주역>의 벽괘는 12달이 아니라 윤달을 포함해 14개월을 상징하게 됐다. 윤달은 보충적 성격을 지니지만, 역설적으로 중부괘와 소과괘의 정신은 60개 모두에 해당한다. 중부괘는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새끼를 부화하는 정성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가장 정성을 많이 들이는 일이 어미가 자식을 낳는 것이다. 국정운영이나 기업경영도 그래야 한다. 소과괘는 새가 하늘로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것만큼 매사에 과감하게 임해야 한다는 의미다. 변화의 시기에 맞게 변화하려면 원래 하는 일보다 조금 더 지나치게 해야 의도한 게 이뤄지는 법이다. 관성과 관행을 개혁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소과의 정신이다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고, 한국의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앞으로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추격형 국가나 기업을 넘어서 세계의 중심 국가 기업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국가나 기업에게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전환이다. 우주의 계절이 달라지듯 국가와 기업의 운영도 동아시아 문명론이 제안하는 것처럼 변화의 계절을 잘 살피고 대응해야 한다. 그 바탕은 동아시아 문명론이 제안하는 것처럼 중부괘와 같이 정성을 다하고, 소과괘와 같이 조금은 적극적으로 국가와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임채원 경희대학교 교수
 

* 필자 소개 : 필자 임채원은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하고 동대학 한국행정연구소와 국가리더십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경희대에서는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문명의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 20여개 중앙·주정부의 정책 어젠다를 공동 연구하는 '비교어젠다 프로젝트'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참여 중이다. 이번 기획은 필자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연구와 실천을 토대로 동아시아 문명의 가능성과 미래에 관해 <뉴스토마토>에 격주로 총 13회로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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