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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4화)이웃, 사라진 까치밥의 상생(相生)문화
“감 다 따버리지 않고 / 까치밥으로 남겨둔다”
2018-03-26 08:00:00 2018-03-26 10:53:40
얼마 전 한 신문이 보도한 이웃 간의 고소사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기사에 따르면, 2015년 서울의 한 주택에 사는 권아무개(80대)씨가 담을 넘어 이웃집으로 늘어진 감나무의 가지치기를 이웃주민 전아무개(60대)씨에게 일당을 주고 맡겼는데, 전씨가 작업 도중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두개골 골절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전씨는 사고 1년7개월 후 권씨 부부를 상대로 치료비와 위자료 등 3000만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고, 소송이 1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권씨는 사망했다. 이 둘의 관계가 ‘도급’이냐 ‘고용’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판사의 판결은 위자료 200만원 지급이었다.
 
옆집 이웃에서 사이버(cyber) 이웃으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세상에는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고, 피와 상관없이 맺어진 가족도 있다. 일 년 가야 한 번 보기 힘든 일가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의지되는 경우도 있고, 그 이웃사촌도 옛말이라 층간소음에 얼굴 붉히는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다. 이웃집으로 담을 넘어간 감나무의 가지치기를 맡길 때 맡긴 쪽 주민은 80대의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60대인 이웃주민에게 일감을 준다는 뜻에서 일당 15만원을 제안했다하고 이웃주민은 답례의 뜻으로 금액을 10만원으로 깎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자 이웃사촌은 원수지간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사고 직후가 아닌 1년7개월 후에서야 소송을 결정한 이웃의 고민도 컸으려니와, 소송기간 동안 세상을 떠난 고령의 감나무 주인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오묘하여 얼굴을 모를 때는 아파트 위층 아이들이 뛰는 소리에 화가 나지만, 아이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그 부모를 알게 되면 참고 넘기게 되는 것이다. 내게 아이가 있으면 더 잘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해관계가 걸리면, 특히 그것이 생존에 관한 문제라면, 수십 년간 ‘가족’처럼 지내온 한 마을 이웃끼리 적대적 관계로 급변한다. 가뭄에 피가 마르는 농민에게 논에 물을 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으랴. 하여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마을사람들끼리 “물싸움 끝에 괭이로 몸에 물꼬를 내”는 비극도 가능했던 것이다.
 
옥정골 아이들과
지곡리 아이들 패싸움 났다
< … >
양편 다 콧등 터지고 다리 절뚝거리고
팔 삐고 낯짝 깨어졌다
< … >
싸울 만큼 싸우고 나서
옥정골 아이들 우두머리와
지곡리 대장이 그만두자고 결판내었다
우리 어른들 흉내내지 말자고 결판내었다
사실인즉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지난여름 물싸움 때
옥정골 사람 지곡리 사람 삽 가지고 낫 가지고
물꼬싸움 물싸움 한 적 있었다
(‘두 동네 아이들’, 4권)
 
물꼬싸움에 형제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버지 세상 떠난 지 십년 되더니 / 의좋던 형제 / 상필이 상구 틈 벌어지더니 / 아니나다를까 / 위아래 논 따로 짓는지라 / 큰물져 / 물싸움 붙었다 / 농사꾼 물싸움이야 개싸움이지만 / 형제간에 팔 걷어붙인 싸움이라 / 동네방네 사람들 우르르 나왔다 / 홍식이가 뜯어말렸다 / 아 자네들 아버님 산소 빤히 내려다보는 데서 / 이 무슨 불효막심한 짓이란 말인가 / < … >”(‘상필이 형제’, 3권)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고 옆집에서 누군가 고독사해도 모르는 시대가 되면서, 물리적 공간에서의 이웃은 멀어진 반면 사이버 이웃은 활발해졌다. 소셜미디어(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이웃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지만, 블로그 이웃도 페이스북 친구도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는 현실의 이웃·친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수백, 수천의 인맥을 자랑하려는 심리 속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를 풍미한 한국판 SNS인 싸이월드에서 서로 친밀한 사이임을 드러내기 위해―달리 표현하자면 상호인정의 의미로―혈족관계를 지칭하는 ‘일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가히 혈연중심적 사고의 반영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정보의 교환이나 디지털 공론장으로서의 SNS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 연구논문의 분석에 따르면, SNS에서의 이웃연결망 규모는 마을공동체 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이 마을공동체 의식을 매개로 여타 변인들과 함께 연동하여 시민덕목으로 연결된다고 한다(김상돈·전계영, “SNS 이웃 연결망이 시민덕목에 미치는 영향 – 마을공동체 의식의 매개효과 분석”, <공공사회연구> 4권 1호, 2014.02, 62쪽). SNS상에서의 사회이슈들의 공론화, 의식의 공유, 현실의 물리적 공간에서의 SNS사용자들의 집결 등을 생각할 때, 이는 새로운 형식의 이웃이자 공동체의 형성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난 2월 평창 동계 올림픽 기간 동안 국가대표 선수들은 대회에 출전하면서 국민들과 직접 SNS로 소통하기도 했다. 넓게 보면 SNS가 만든 새로운 디지털 공론장의 사례라 볼 수 있다. 사진/뉴시스
 
까치밥과 콩 세 알에 담긴 마음
감나무의 감을 딸 때 가지 끝에 매달린 감 몇 알은 까치(로 대표되는 새들)의 먹이로 남겨둘 것. 밭에 콩을 심을 때는 세 알씩 넣어, 한 알은 땅 속의 벌레가 먹고 또 한 알은 하늘의 새가 먹고 마지막 한 알은 싹을 틔워 인간이 먹게 할 것. 옛 어른들의 말씀과 생활에는 나눠먹고 상생하는 공존의 철학이 배어 있다. 짐승과 새와 벌레의 삶까지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사고는 현대의 환경보호운동이나 자연친화적 사상 이전에 이미 자연합일의 삶을 살았던 옛 사람들의 일상 그 자체였던 것이다. “< … > / 으레 한반도 남도 집집마다 감나무 한 그루 / 감 다 따버리지 않고 / 까치밥으로 남겨둔다 // 그 언저리 개들도 개밥그릇 다 핥지 않고 / 밥 한입거리 / 까치밥 남겨둔다”(‘까치’, 15권).
 
2016년 타계한 송수권 시인은 자신의 시 ‘까치밥’에서, 나눔과 배려의 마음이 누군가에게는―짐승이든 사람이든―살아갈 힘을 주게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 … >
(송수권, ‘까치밥’)
 
옛 어른들이 논밭에서,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혹은 굿을 할 때, ‘고수레(고시레)’라고 외치면서 음식을 조금 떼어 허공에 던지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고수레 행위의 기원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거니와, 그 중 하나가 단군시대에 농사짓는 법과 불 쓰는 법을 가르쳐 준 농신(農神) 고시(高失)씨에게 감사하기 위해 음식을 바친 데서 나왔다는 설이다. 조금씩 변이된 여러 설화들은 그러나, 풍요를 기원하고 감사의 뜻으로 음식을 신에게 바치는 공희(供犧)의 의미가 있고 ‘고수레’라는 주언(呪言)과 함께 음식을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과 나누는 의식(儀式)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3월15일 서울 사직공원 사직단 내 단군성전에서 단기 4351년 어천절(御天節) 대제가 열리고 있는 모습. 3월15일은 단군이 세사를 모두 마치고 승천한 날이며, 이 날을 어천절이라 칭한다. 음식을 나눠먹는 음복례도 진행된다. 사진/뉴시스
 
< … >
동방 농신 고시(高矢)씨한테
단군 세계 백성들이
삼가 기려
고시씨한테 드리는 제사
가을걷이 해마다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사 뒤
제수 음식 나눠먹으며
가난 메우고
주림 메워왔으니
농신 조상신께 바친 제수(祭羞)
그 선물(膳物)로 함께 먹었으니
제사 지낸 음식이
바로 선(膳)이라
 
그로부터 고시레 고시레로 남아
까막까치 한끼 밥 던져주는
살뜰한 풍속 남아 있는 시절 있다
얼마나 좋아
아이고
얼마나 좋아
나 먹기 전
누구한테
무엇한테 먼저 나눠 바치는 마음
나 먹기 전
먼 옛날 농사꾼 조상한테
계면쩍게 한숟갈 올리는 마음
< … >
(‘고시레’, 29권)
 
봄에 직접 모내기를 한 벼를 수확하기 앞서 고수레를 체험해보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런데 이 고수레 문화는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몽골족에게도,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랴트족에게도, 그리고 이 바이칼과 알타이에서 이동해 간 것으로 추정되는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에게도, 고수레 문화가 찾아진다. 필자가 본 몽골인 말사육자는 술을 마시기 전 하늘과 땅에 먼저 술을 뿌린 후 양 눈썹 사이(인당)에 술을 찍어 자신의 음주에 대한 허가를 구했고, 인도에서 만난 티베트부인은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새들에게 고수레로 빵조각을 던져 주고 나서 자신의 몫을 먹었다. 하늘에 땅에, 길짐승에 날짐승에, 물속 물고기와 땅속 벌레,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이웃’의 개념은 이렇게 확장된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자,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고 되묻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다, 라고 스스로 대답한 율법사에게 예수가 이를 행하면 살리라, 하니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예수에게 묻는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여기서 예수가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존 관념을 깨버리는 것이다(누가복음 10장 25~37절).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율법을 받드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피해 지나가 버리지만, 이방인으로 경멸받던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처치하고 주막으로 데려와 돌본다. 심지어 다음날 주막 주인에게 은화를 주어가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기까지 한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 조문에 얽매어(만지고 나서 율법대로 ‘정결의식’을 행하면 되지 않는가! 게다가 그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자들의 ‘이웃’ 개념은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에만 머물겠지만,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정한 이웃이란 자비를 베푸는 자,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고, 율법 조항은 몰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자로, 이방인이든 누구든 상관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묻는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누가 10:36).
 
물론,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니까 망건 값 달라”거나 “내 봇짐 내라” 할 수도 있다.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는 더더욱 그러해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려다가 낭패를 보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사마리아인 식의 자비를 베푸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지구상에서 나와 함께 숨 쉬는 모든 존재들을 나의 이웃으로, 나를 그들의 이웃으로 확장시키는 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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