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3화)문화주택과 토막촌의 공존, 그리고 국민주택
“화곡동 개발 첫번째 국민주택 한 채가 그대로 있다”
2018-03-12 08:00:00 2018-03-12 08:00:00
한때, 봄·가을은 ‘이사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사가 많아지는 계절이었다. 요즘은 포장이사로 날씨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아서인지 신학기 시작 전인 여름·겨울철의 이사도 적지 않다. 집! 많은 사람들의 숙원으로, 늘 오르내리는 전·월세비와 매매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최근의 뉴스는 정부의 강남지역 재건축 규제가 강북지역 재개발 시장인 단독·다세대·다가구주택에 대한 투자를 낳고 있다는 소식도 전한다. 일제강점기의 문화주택이나 1950~1960년대에 시작된 국민주택에도 집을 향한 사람들의 열망이 서려 있다.
 
정부가 최근 강남 재건축 규제를 펼치는 가운데 강북 재개발 쪽으로 투자자들이 몰리고 있다. 사진은 서울 롯데월드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모습. 사진/뉴시스
 
경성의 문화주택, 그 함의
‘문화주택’은 일본의 다이쇼 시대(大正, 1912~1926)에 서양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졌던 주택으로, 증가하는 도시중간계급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주생활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진행된 이 주택개량사업은 일제강점기의 조선 땅에 고스란히 전해지게 된다. ‘문화주택’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계기를 보통 1922년의 ‘평화기념 도쿄박람회’로 보는데, 이 박람회에서 ‘문화촌’이라는 이름으로 14채의 실물주택이 선보여졌다. 이 문화촌의 문화주택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주생활의 근대화’ 내지 ‘합리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이미 그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8월2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친일파 ‘백작’ 이완용의 우스꽝스러운 말은 당시 서구사대주의적 근대화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병합된 후 조선은 만반의 사무가 착착 진보하고 있는데 이에 비하여 가정은 그 면목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 … > 나는 우리 가정에는 제일 조선 부엌의 정결치 못함은 실로 위험한 줄 알고 먼저 나의 가정에서 이 개량을 시험하기 위하여 엄중한 감독 하에 여러 가지로 힘을 들이고 있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 있는 양옥집을 건축하고 식사는 요리사를 고용하여 항상 서양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 … >”(최병택, 예지숙 지음, <경성리포트: 식민지 일상에서 오늘의 우리를 보다>, 시공사 2009, 67쪽)
 
문화주택의 개념은 사실 1915년에 개최된 ‘가정박람회’에서 등장했는데, 이완용은 이 박람회의 집행위원이었다. 조선의 부엌과 화장실은 비위생적이고 조선의 집은 비효율적이라는 인식 하에 가정박람회 집행부가 이상적인 가옥으로 제시한 ‘문화주택’의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았다. “1. 두 칸 반 가량 넓이의 부엌과 주부실(주부의 방), 양로실(노부모가 계시는 방), 시비실侍婢室(하녀들의 숙소)가 모두 갖추어진 집 2.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집 3. 가정 병실을 갖춘 집 4. 정원이 있어 어린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집 5. 깨끗한 화장실과 욕실을 갖춘 집 - <매일신보> 1915년 8월31일, 9월3일”(앞의 책, 70쪽)
 
당시로서는(아니 지금도!) 꿈같은 집이라 할 만하다. ‘하녀’방까지야 필요치 않겠으나 누군들 이런 집에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문화주택의 우선적인 주민은 경성에 파견된 일본인 관료와 부호들이었는데, 동부의 신당리·왕십리, 남부의 남산·용산, 서부의 금화장·연희장 같은 곳이 그 지역이다. 조선인의 경우 이완용같이 권력·금력을 가진 자들이 우선이었으나, 중간계층의 보통사람들에게도 문화주택은 열렬히 갖고 싶은 집이었다. 수도 경성으로의 유입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화이트칼라층의 문화주택 열망이 강해지면서 이런저런 부동산 관련사건이 터지고, 솟구치는 집값 상승과 더불어 투기가 횡행하게 된다. 오사카주식거래소 사장이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주주였던 일본인 시마 도쿠조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동원해 토지매매로 폭리를 취한 ‘신당리토지매매사건’(1928~1931)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앞의 책, 74~81쪽).
 
1921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주택난의 활증거”는 “경성시내의 가옥은 삼만 구천 호, 거주하는 가구는 오만 사천여 호, 부족이 실로 일만 오천 호”라는 부제와 함께 경성의 가옥 실태 조사를 보도하고 있다. 기사에 의하면, 일본인 주택은 1만2378 호이고 조선인 가옥은 2만6830 호이다(총 3만9208호). 그런데 조선인의 경우 한 가옥에 몇 가구씩 들어 있는 집이 많고 “한 가정을 가지고 살림을 하는 수효”가 조선사람 편에 3만7927 가구, 일본사람 편에 1만6414 가구로, 결론적으로 시내 총 가옥 수에 비해 1만4033 개의 가옥 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조사 수치를 보면 문화주택에서 여유롭게 사는 일본인들과 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여러 가구의 조선인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기사에서 일본인의 집은 ‘주택’으로, 조선인의 집은 ‘가옥’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택은 가옥의 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지만, 주거 전용의 도시형 주거 형태라는 점에서 일본인들의 문화주택과 조선인들의 전통가옥이 대비되어 머리 속에 그려진다.
 
1915년 8월2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이완용의 가정 박람회에 관한 기사 원문. 자료/국립중앙도서관 신문아카이브
 
멀고도 가까운 문화주택과 토막촌
식민지 자본주의 하의 농촌수탈과 도시화로 인해 먹고 살 길을 찾아 도시로 흘러들어온 많은 소작농들이 날품팔이·공사장 인부·인력거꾼·지게꾼·넝마주이·행상·걸인 같은 도시 빈민이 되었으나 집이 없어 경성 주변에 움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를 ‘토막(土幕)’이라 부르고 거기에 사는 이들을 ‘토막민’이라 불렀다. 토막촌이 몰려 있던 일대는 신당리(당시 행정구역상 고양군 한지면 관할)를 비롯해 숭인동, 창신동, 도화동, 청엽정(현 용산 청파동), 고시정(현 후암동), 북아현리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토막집과 문화주택은 멀고도 가까운 사이로 공존했다. 1931년 1월14일자 <동아일보>에는 이갑기의 만화 ‘작금의 사회상’ 시리즈 네 번째 편이 실렸는데, ‘지척이 천리’라는 제목과 함께 그려진 문화주택과 오두막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작가는 이 두 집의 각각 화려하고 초라한 겉모습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통해 삶의 질 자체가 대비됨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인쇄상태 상 두어 자가 희미하기는 하지만 대략의 내용을 보면, 오두막에서는 “이년아 업스면 그대로 살지 / 여보 배곺하 엇(자)란 말이(요) 어린 것은 젖 달라고 울지 / 애-애애애”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문화주택에서는 음표들과 일본어 글씨(아마도 노래 가사)가 쓰여 있어 음악이 흘러나옴을 알 수 있다.
 
토막촌이 밀집했던 지역들 중 신당리의 경우, 경성부 오물처리장 가까이에 있어 감내해야 했던 악취와 더불어 공동묘지까지 끼고 살던 토막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강제 철거를 당했는데, 이는 문화주택을 건설하려는 일본인 업자들과 용역, 경성부 경찰에 의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오사카 부호 시마 도쿠조의 ‘신당리토지매매사건’도 바로 이런 맥락, 즉 신당리 토막민들을 내쫓고 이 일대에 문화주택을 건설하려는 계획과 연관되어 있었다.
 
1933년 일본인 업자 이와후치는 시마 도쿠조가 경성부로부터 사들이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되팔아 열 배 가까운 수익을 챙겼던 이 땅을 사서 문화주택을 짓기 위해 토막민들을 강제 철거한다. 그 이전인 1931년 5월에도 신당리 251번지 철거사건이 있었는데, 건축업자들과 매각 협상을 벌이던 경성부가 경찰과 용역을 동원해 병자,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거주민들을 쫓아냈고 이는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다. 1931년 5월10일자 <동아일보>는 철거 직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 > 빈궁의 무리는 흩어진 집 이곳저곳에 그대로 둔취屯聚를 하고 있다. 병에 신음하는 소리, 굶주림에 애걸하는 소리, 분노의 부르짖는 소리가 석양 일대에 가득했다. < … > 오창호라는 사람은 자기 집터 위에서 미친 듯이 날뛰며 소리쳐 부르짖고 있었다. 그 부르짖음은 이러하다. “우리가 오죽하면 이 같은 누누중총累累衆塚(무덤이 많은 곳)에 와서 뼈를 골라내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살겠느냐. 우리의 궁상을 모르고 집을 헐어버렸으니 우리는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는데 병든 처는 그 옆에서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한편, 1933년에는 우치다 겐지로라는 악명 높은 업자가 신당리 162번지 토막촌을 철거하려다 토막민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그들에게 지불할 수 없는 금액의 토지사용료를 요구했다는 보도도 1933년 8월5일자 <동아일보>에서 볼 수 있다(최병택, 예지숙 지음, <경성리포트>, 186~195쪽. 위의 동아일보 재인용은 같은 책 192~193쪽).
 
토막민의 삶이나 달동네 주민들의 삶은 세월이 흘러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신당동 일대 재개발로 인해 1986년 10월31일 신당동 주민들은 폭력적인 강제 철거를 당했다. 철거는 완료되었으나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은 비닐천막을 짓고 살게 된다. 같은 해 12월2일 철거반원들이 이 비닐천막마저도 제거하려 하자 이에 저항하던 철거민들 중 최홍숙 씨가 항의의 의미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이 이를 입증하는 한 예라 하겠다.
 
일제시대 강제징용 목적으로 노동자들의 숙소가 있던 인천시 부평구 삼릉 줄사택 골목은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진/뉴시스
 
국민주택의 출현
서양식 생활양식과 주택형식을 따르는 것이 근대화와 동일시되고 ‘문화’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일제강점기에 문화주택이 출현했다면, 한국전쟁 후 주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정책이 1950년대 후반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대규모 공영단독주택지, 즉 ‘국민주택’이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사이에 많은 국민주택들이 세워졌는데, 불광동·북가좌동·상도동·우이동·갈현동 그리고 화곡동 국민주택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노령산맥 넘으면
거기 전라남도 장성땅
대대로
흙 일구어 먹고살다가
에라
놀음빚도 아닌데
시나브로
쌓이는 빚 이내 걷어 갚고 나서
덜렁
솥단지와 쭈그렁 마누라와
재작년 마늘 같은 새끼 세 놈과 떠났다
 
< … >
 
여기가 어디인가
루핑으로 벽을 쳐
달빛이 환장하게 밝은 밤이었다
서울 변두리 봉천동
 
봉천동 이씨
비 오지 않으면
허어 야단났네그려
논밭 바짝바짝 타들어가겠는데그려
그러다가
비 오면
허어 이제사 심은 모 덩실덩실 춤추겠는데그려
 
천릿길 고향 떠나
국민주택 작업장 모래짐 나르는 잡부인데도
공치는 날
동네 판잣집 이발소 언저리에서
영락없는
지난날의 농사꾼 그대로
허어 이제 나락 잘도 패겠네그려
이렇게 뜨거운 날
(‘봉천동 이씨’, 10권)
 
서울 화곡동 화곡국민학교 건너편에는
화곡동 개발 첫번째 국민주택 한 채가 그대로 있다
담장 블록은 다 무너졌고
현관 강판문짝도 녹슬어 너덜거린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 이정구 영감한테
1년 전 마누라 잃은 뒤
슬슬 바람 일어 실어증이 찾아왔다
 
세월이야 흘러 흘러
새벽에 잠깨어
한밤중 잠들기까지
항상 입을 열어 구시렁구시렁
 
바람 불어도 구시렁
비 와도 구시렁
진눈깨비 구시렁 안개 는개 구시렁
 
그런 집인데 밤손님 들어왔다가
방 안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 듣고
이크 안되겠다 하고 그냥 갔다
 
< … >
(‘구시렁구시렁’, 12권)
 
사실, 공동주택단지의 조성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34년 제정·발포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이루어지고 1941년 조선주택영단이 설립되어 공동주택단지인 영단주택단지를 서울의 영등포지구(현 문래동)와 상도지구(현 상도동)에 조성했다. 이는 일제가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위해 건설한 군수산업체 노동자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급된 주택이었다.
 
한편, 해방 후 1950~1960년대 도시 변두리 지역에 건설된 국민주택은 서민용 공동주택단지로, 1957년 대한주택영단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단독주택 또는 연립주택의 형태를 띤 국민주택 역시 서구식 건축개념에 따른 부엌과 화장실, 거실을 만들고 서구식 주거생활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문화주택’으로 불렸고 그 지역은 ‘문화촌’이라 불렸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문화’에 대한 (서구를 향해) 경도된 의식이 당시 우리 사회의 인식수준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 2015년 한울문화재연구원은 '서울 종로 공평 1·2·4지구 도시환경정비 사업부지'에서 진행한 발굴조사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도시 골목과 주택 흔적을 발견했다. 사진은 당시 일반에 공개된 부지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