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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인권이야기)‘태극기 집회’와 화이트리스트
2017-01-31 13:45:28 2017-01-31 13:45:59
고등학교를 수원에서 나왔는데, 학교 다니면서 몇 번이나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서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통령이 지나가신다는 이유에서였다. 철없던 우리는 수업 시간 빼먹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별 불만은 없었다. 온다는 대통령은 안 오고 지루하게 기다리고는 했는데 대통령을 실은 차는 허망하게 순식간에 지나가고는 했다.
 
대학생 때는 ‘학살자’인 대통령이 외국 순방에서 귀국하는 걸 이용해서 반정부 시위를 할까를 궁리하고는 했지만 대부분의 계획은 실패했다. 대신 TV를 통해서 대통령이 귀국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동원된 국민들 앞에 대통령이 탄 차가 멈춰서고 이윽고 대통령이 영부인과 내려서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국민들과 악수하는 모습을 치를 떨면서 지켜보았다.
 
그러던 관제데모는 민주화 과정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군복 입고 태극기를 든 노인 분들이 거리에 모습을 나타났다. 때로는 가스통에 불을 붙이고, 과격한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는 노골적인 관제동원 데모가 다시 나타났다. 그때부터 돈 받고 동원되었다는 말들이 나오기도 했고, 어떤 집회 현장에서는 실제 돈을 주고받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는 ‘어버이’, ‘엄마’라는 희한한 이름의 보수단체들이 극성을 떨었다. 그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을 모독하고, 수십일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기까지 해서 어떻게 자식을 잃은 유가족 앞에서 인간으로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이런 단체들의 집단행동에는 청와대가 깊이 개입해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대열에 이름을 올린 문화예술인들을 블랙리스트로 관리했다는 정황도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에 똬리를 틀고 앉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와 기획에 따라 청와대 행정관들이 움직였고, 문체부 전 장관 조윤선과 그 라인이 움직이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 그들은 블랙리스트 건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지만, 구체적인 증거들이 드러나 구속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이트리스트가 드러나고 있다. 친정부 단체들을 관제데모에 동원하고, 그들 단체에 3년간 70억 원을 지원했고, 그 돈은 삼성, 현대, 에스케이, 엘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모아진 돈으로 동원된 이들에게 2만원, 5만원, 15만원씩 나눠줬다. 기업 중에는 삼성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전경련이 기금 관리 역할을 나눠 맡았다.
 
블랙리스트나 화이트리스트나 본질에서는 같다. 국가권력이 여론을 왜곡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범죄적이다. 민주주의에서는 반정부든 친정부든 의사를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야 여론이 형성될 수 있고, 그래야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여론을 정권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작해왔다면 이것만으로도 반 헌법행위이고, 국기문란이 아닐 수 없다.
 
특검이나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해 단호하게 수사해야 하고, 국회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블랙리스트 금지법’과 함께 ‘화이트리스트 금지법’도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기업과 전경련에 대한 단죄도 필요하다. 차제에 말썽 많은 전경련은 해체되는 게 마땅하다. 돈 주고 여론을 조작하고, 동원하는 ‘태극기 집회’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범죄행위임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박래군 뉴스토마토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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