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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기술마저 제것으로…ETRI의 황당한 '창조경제'
1171억원 투입해 "기술 국산화 성공"…업계는 황당 "이미 상용화에 납품까지"
2016-10-05 07:00:00 2017-03-20 18:11:30
[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급 두뇌들이 모인 정보통신 기술 개발의 산실이었다. 우리나라 이동통신·전자 산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일등공신 D램 메모리 반도체와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기술은 모두 ETRI에서 개발됐다. 이 덕에 학계와 업계에서 ETRI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현 정부 들어 그 위세는 더해졌다. 최문기 전 장관과 최양희 장관 등 박근혜정부의 전·현직 미래창조과학부 수장이 모두 ETRI 출신일 정도다.
 
부작용도 낳았다. ETRI가 현 정부의 창조경제 구현과 중소기업 육성을 맹목적으로 좇으면서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등 국책연구기관으서의 행태에 부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제기됐다. ETRI 출신의 한 관계자는 "이제 인재들은 ETRI 대신 학계나 삼성, LG 등 민간기업으로 몰린다. ETRI에 남은 사람들은 자리만 지키며 연구개발도 게을리한다"며 "보고서만 그럴듯하게 써 돈 만들 궁리만 한다"고 꼬집었다.
 
서울시의 '지하철 통신서비스 수준 향상 사업(공공 와이파이 사업)'도 ETRI로 인한 피해 사례로까지 지목된다. 해당 사업 내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서울시 지하철 통신서비스 관련 실무진들은 ETRI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 '설마 ETRI가 하는 게 잘못되겠느냐'고까지 말한다"며 "박원순 시장을 비롯해 참모진들 역시 테크노크라트가 아니기 때문에 기술적인 이해도가 부족하다. 때문에 ETRI가 무슨 말을 해도 믿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가 올해 2월 발표한 '디지털 기본계획 2020'은 당초 박원순 시장의 공약에도 포함됐던 내용이지만, 발표 시점은 공교롭게도 ETRI가 MHN 기술을 시연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한 지 한 달 뒤였다. ETRI는 지난해 7월 보도자료를 통해 "대전시 인근 국도에서 MHN 기술을 성공적으로 시연했다"며 "본 기술이 상용화되면 관련 중소·중견기업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현재 진행 중인 국제표준 선정을 통해 세계시장 진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장밋빛 미래를 제시했다. 올해 1월에는 "서울 지하철 8호선 석촌-송파-잠실역에서 초고속 인터넷 시연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사진/뉴스토마토
 
서울시는 2월23일 디지털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지하철 통신서비스 수준 향상과 관련해 "2017년부터는 달리는 지하철과 버스를 비롯해 서울 모든 공공장소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이 사업을 위해 민자유치를 함께 활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ETRI로부터 공공 와이파이 구축과 관련해 자문을 받았다. 취재팀이 추혜선 정의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ETRI 사업내역을 보면, ETRI는 MHN 기술 개발 초기인 2013년부터 이미 2017년을 상용화 시점으로 못 박았다.
 
서울시의 구상은 ETRI로부터 MHN 기술을 이전받은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시내 교통망에 MHN을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실행은 지지부진하다. 서울시는 지난 4월 초고속 공공 와이파이 사업 참가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냈지만, 두 달 만에 이를 전격 취소했다. 기업들이 투자비용 대비 수익성이 적다는 결론 아래 사업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민간기업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 시설을 구축하고 운영하며 개별적인 수익모델을 개발해서 지하철 회사에 시설물 점용료를 내야 한다"며 "대기업 이동통신사들이 수익성에 회의적인 시각을 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ETRI의 MHN 기술은 아직 상용화가 안 돼 도입이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선 ETRI의 시연은 ETRI에서 마련한 단말기와 장비로 수행, 고속으로 이동하며 객차 내 수백명이 동시에 접속하는 실제 환경과 여건이 매우 다르다는 지적이다. 또 기술의 핵심을 담당해야 할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MHN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ETRI는 기술 소프트웨어 개발과 무관한 하드웨어 업체에 기술을 이전했다. 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ETRI의 MHN 기술은 아무것도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그러나 모두 직간접적으로 ETRI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쉬쉬한다"고 말했다.
 
2015년 7월1일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대전 인근 국도에서 이동무선 백홀(MHN) 기술을 시연했다. 사진/ETRI

그럼에도 ETRI는 MHN 기술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 올해 5월 ETRI는 S사, P사 등과 함께 2018년까지 MHN 기술을 상용화하는 MOU를 체결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MHN의 실체는 찾기 힘들다. P사는 올해 1월27일 설립, 기술개발 실적이 전무한 신생 업체다. 오히려 설립 넉 달 만에 ETRI와 MOU를 체결했다는 점에서 그 배경에 이목이 쏠린다. S사 역시 MOU 이후 MHN 상용화에 대한 세부계획이 마련되지 않았다. S사 관계자는 "회사 대표조차 MHN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더라"며 "실제로는 다른 과제를 위해 ETRI와 MOU를 체결했다는 말도 들린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ETRI 관계자는 "ETRI는 무선전송 핵심기술을 개발했고 관련 특허 60여건을 출원, 상용화를 위한 도로환경 및 지하철 환경에서 시연했다"며 "S사는 ETRI가 2014년부터 수행 중인 MHN 통합과제의 공동 연구기관이며, P사 역시 MHN 기술 상용화 촉진 관점에서 MOU를 체결했다"고 해명했다.
 
물리적으로도 6개월여 남은 공공 와이파이 구축 시점을 맞추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서울시는 지난 9월26일 2차 사업공고를 냈다. 그런데 애초 2월 계획 때보다 기술에 대한 조건이 더 까다로워졌다. 2월에는 이동무선 속도가 '300Mbps 이상'으로 제시됐지만, 이번 2차 공고에서는 '360Mbps 이상'으로 높아졌다. 'AP(Access Point) 동시 접속자 수 160명 이상'이라는 새로운 조건까지 생겼다. MHN을 염두에 뒀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기술 개발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파악 없이 조건만 높이면서 현실성은 더욱 떨어졌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서울시가 기술적인 부분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현실성 없는 계획을 계속 수립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지하철 공공 와이파이 사업과 관련해 MHN 기술은 아직 상용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아니다. MHN 도입은 사실상 어렵다고 내부적으로 잠정 결론내렸다"며 "시민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고려, 사업자가 기술조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 공공 와이파이 사업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TRI의 또 다른 이동통신 개발사업인 스몰셀 기술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소형 기지국을 설치해 통신 사각지대를 없앤다는 이 기술은 ETRI가 2014년 초부터 뛰어들었다. 추혜선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스몰셀 사업 보고서를 보면, 현재까지 투입된 정부출연금은 1171억여만원에 이른다. ETRI는 올해 6월 스몰셀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보도자료를 보면, ETRI는 "현재 스몰셀 기지국 관련 소프트웨어는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가격경쟁력 약화, 제품 출시가 늦어지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며 "이번 기술 개발로 5G 이동통신 시장을 선점하고, 해외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우리나라 중소기업 기술경쟁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ETRI의 기술 개발로 국내 스몰셀 기지국 업체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며 "앞으로 5년간 해외 지불 로열티는 약 657억원 절감, 해외시장 진출시에도 2조3000억원 이상의 매출이 기대된다"고 주장했다.
 
정작 이 소식을 접한 국내 이동통신 업계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국내에서 스몰셀 기술은 I사, C사, J사 등 다수의 중소기업들이 2012년부터 관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 삼성전자와 중국 등에 납품하고 있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우리회사에서 이미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부품 등을 자체 개발해서 대기업과 해외에 납품하고 있다"며 "ETRI가 국내 업체에 기술이전을 제안하자 업체들은 이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는 "ETRI가 스몰셀을 개발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업계에서는 '그걸 왜 하냐'는 말이 많았다"며 "소프트웨어 국산화를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했지만, 정작 결과물을 국내 중소기업이 활용하지 않는 촌극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ETRI 관계자는 "ETRI는 국가적인 차원의 기술확보가 필요한 상황에서 기술개발을 수행했으며, 1171억원은 5G이동통신 핵심기술 개발사업 총액이고 스몰셀 기술 관련은 161억원"이라며 "현재 국내 중소기업은 매년 수억원을 들여 외산 장비를 수입해 제품을 만들고 있는 실정으로, ETRI는 기존  것보다 업그레이드했고 1개 기업에도 기술을 이전했으며, 중소기업들이 흥미를 가지고 문의를 하는 상황"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국내 중소기업이 활용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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