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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세상의 풍경으로 존재할 권리에 대해서
2021-03-19 00:00:01 2021-03-19 00:00:01
나는 말과 글로 비워내는 작업을 즐긴다. 무겁게 쌓아두면 마음이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숨을 헐떡이게 된다. 물론 모든 걸 말과 글로 비워내진 않는다. 비워낼 것과 담아 둘 것의 의미는 아는 나이가 됐다.
 
어떤 이는 이런 날 가볍다고도 본다. 우리 사회는 말 많은 자보다 침묵을 지키는 자를 더 우대한다. 내 눈엔 속마음을 숨기는 음흉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침묵하는 자를 두려워한다. 반대로 어떤 이는 내게 고맙단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편하게 말을 해줘서, 먼저 얘기를 꺼내줘 고맙단다.
 
몇 년 전 친구의 부고 소식을 받았다. 사실 친구라고 하기엔 꽤 먼 거리가 있었다.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안부 인사 주고받고 몇 년에 한 번씩 얼굴 보던 사이였다. 그 친구가 떠나기 몇 개월 전 우연히 함께 술을 먹게 됐다. 친구는 40여 년 간 숨겨왔던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놨다. 꽤 놀랐지만 ‘안 놀란’ 척 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내게 털어 놓은 이유를 전했다. “나를 적당히 아는 친구가 적당한 거리에서 날 제대로 바라봐 줄 것만 같았다”라고.
 
그땐 몰랐다. ‘적당한 거리’의 의미를. 그저 내가 발달장애인 아들을 키우기에 세상의 차별과 혐오에 민감할 것이란 동지의식에서 ‘커밍아웃’을 한 것인가 싶었다.
 
지난주 일이다. 아들과 산책을 다녀왔다. 기분이 좋아진 아들이 집 앞에서 방방 뛰며 내 눈엔 귀엽지만 남들 눈엔 낯설게 보일 수 있는 괴성을 지르며 웃었다. 그때 이웃의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우리 곁을 지나갔다. 아이는 아들을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면 쳐다본 게 아닌 혐오였다. 겨우 아홉 살이다. 아홉 살 아이 눈에서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한 혐오와 멸시의 시선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단 사실에 놀라 온 몸이 떨렸다.
 
그 아이의 눈빛을 받으며 세상을 떠난 그 친구가 지금 떠오른다. 아직 어린아이인 발달장애인에게도 이럴진 데 그 친구는 어땠을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에 있단 이유로 내게 비워낼 수밖에 없던 그 마음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시간이 이만큼 지난 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게 너무 미안하다.
 
여러 문학작품과 영상 콘텐츠(영화 방송)은 소수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사회적 환기의 모멘텀으로 이용한다. 장애도 없고, 성 정체성이 다르지 않은 이들이 소수에게 “함께 합시다” “힘을 냅시다”라며 응원하고 손을 내민다. 그런 응원을 받으면 힘이 날까. 정말 그들은 함께 해 줄까. 특정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그런 응원이 아닌 모든 소수자가 그저 세상의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존재하면 안 됐던 것일까. 모두가 그렇게 세상의 풍경으로 지금처럼 존재하듯.
 
서울시장을 넘어 대통령까지 바라보는 한 정치인이 ‘다름을 거부할 권리’를 외치는 세상이다. 그 친구가 떠올랐다. 난 지금도 괴성을 지르는 아들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다. 이 세상은 아직도 멀고 멀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멀었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 걸까.
 
마지막으로 많이 늦었기에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고 변희수 하사의 명복을 빌고 그의 영면을 기원한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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