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삶은 어렵다. 그저 살아가다 보면 살아지는 게 삶이라 하지만 ‘살아가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있단 걸 알게 된다면 이미 ‘어른’이 됐단 서글픈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됐다고 모든 게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왜 그렇게 '어른'이 되면 포기해야 하는 게 많은 건지. 그리고 ‘어른’이 되면 왜 그렇게 책임져야 할 게 많은 건지. 그래서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는 ‘사회적 동물’이 되는 건가 보다. ‘연대’란 말의 힘도 그래서 도드라지고 또 움트고 싹을 틔우는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 ‘아이’는 그런 얘기다. 너무도 보편 타당한 우리 얘기이지만 그래서 너무도 어렵고 힘든 얘기일 수도 있다. 살아가는데, 살기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그게 왜 그렇게 힘이 들고 또 어렵게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나와 당신과 우리의 얘기가 담은 ‘아이’는 뜨겁지도 않고 뜨끔하지도 않으며 또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도 없다. 그저 우리 삶이 이렇기에 우리는 이랬으면 한다는 걸 얘기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얘기이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하고 또 그걸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부터가 시작’이란 말이 있다. 삶은 여러 가지를 우리 삶에 가져다 준다. 그 가운데 가장 괴이한 녀석이 바로 ‘망각’이다. ‘아이’는 망각의 늪 한 켠에 자리하는 우리 모두가 회피하고 있던 ‘무엇’을 그저 건드릴 뿐이다.
‘아이’는 두 여성이 주인공이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여성’의 서사로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는 보편 타당한 우리 모두에 대한 시선이다. 보호종료를 앞둔 아동 아영(김향기)과 싱글맘 영채(류현경) 두 사람이 겪고 또 헤쳐나갈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이 아영과 영채와 같은 이들에게 보내는 편견에 대한 가감 없는 시선 속 담긴 이면만을 보여준다.
아영은 보호 종료 이후 같은 보육원 출신 친구들과 함께 그룹 홈에서 생활 중이다. 어른과 아이의 중간 어디쯤에 놓여 있는 아영과 친구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기본적인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가치관과 판단 능력이 형성되기 이전이다. 간단한 세탁기 고장 하나 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고장 난 세탁기를 처량하게 바라보는 아영. 두들기고 때려서라도 제대로 돌게 만들어야 하는 세탁기 신세가 꼭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영화 '아이'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생활비를 벌기 위해 유흥업소에 나가는 싱글맘 영채. 혼자 아들 ‘혁’을 키워야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엄마로서의 자격 부족에 스스로를 자책하며 지내던 영채에게 어느 날 아영이 다가온다. 돈을 벌어야 하는 아영과 베이비시터가 절실한 영채. 두 사람은 각자의 이익과 필요에 의해 ‘관계의 형성’ 단계에 들어간다. 하지만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승전결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실질적으로 ‘아이’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 과정이다.
절실함에서 시작한 아영은 어느덧 어린 ‘혁’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보게 됐는지 모른다. 아영은 ‘돈’이 아닌 진심을 통해 ‘혁’을 돌보게 된다. 자립을 위한 필요에 의한 돌봄이 아닌, 진심을 통해 첫 번째 ‘관계의 형성’에 손을 먼저 내민 아영이다. ‘혁’이 역시 그런 아영의 손을 잡고 엄마인 영채보다 더 신뢰하는 살가움을 보인다. 대학에서 아동학을 전공하는 아영은 그런 혁이가 더욱 더 소중하다.
영화 '아이'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우연한 사고였다. 그 사고의 누명을 쓴 아영과 아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야만 하는 영채의 갈등. 그리고 그 두 사람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 아영과 영채 모두 사실 버티고 버텨서 지금까지 이어왔다. 하지만 그들도 이제 결국 막다른 길에 몰렸다. 언제나 혼자, 홀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고 또 해결해 왔다. ‘제대로 좀 살자’며 보육원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는 아영의 소리 없는 악다구니도, 절대로 선택해선 안될 ‘그것’에 손을 내밀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짚어버린 영채의 실수도. 모두가 혼자였기에 가능했고 이뤄진 일이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돼 버렸고 또 어른으로서의 삶을 강요 받는 아영. 이미 어른이지만 어른의 삶이 버겁고 그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현실에 한 없이 자책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영채. 어쩌면 두 사람 모습은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 이 사회가 만들어 낸 끔찍한 ‘소외의 쳇바퀴’는 아닐까 싶다.
영화 '아이'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지극히 신파적일 수 있었다. 지극히 자극적일 수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끌고 갈 가능성과 여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 모든 것을 외면한다. 더하지도 보태지도 않았다. ‘지금’을 그대로 보여주고 ‘현실’을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겉으로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만 하는 김향기의 연기가 고통을 넘어 저릿하게 다가온다. 아귀처럼 삶 속에서 바둥거리지만 그저 제자리에서만 허우적댈 뿐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류현경이 연기한 ‘영채’에게서 우리 사회의 ‘외면과 소외’가 얼마나 골이 깊게 박혀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물론 해답은 있다. 딱 하나다. ‘내가 도와 줄게요’라며 아영이 내민 손. 어렵지만 쉬운 일이다. 당연히 쉽지 않지만 어렵지도 않다. 주변을 돌아보고 최소한 그들에게 손 한 번 내밀어 달란 게 아니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봐 주는 것 만으로도 그들은 일어설 용기를 얻고 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한 아동학과 수업에서 나온 내용을 상기해 보면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일종의 ‘시선 폭력’. 고아인 아영에게도 분명히 부모는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영채는 ‘그렇고 그럴 것이다’란 선입견. 편부모 가정에서 사는 아이들과 양부모 가정에서 사는 아이들의 다른 지점을 논하는 모습 등.
영화 '아이' 스틸.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아이’는 그저 있고 없고, 또 외면과 소외,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연대 등 모든 것을 담아낸 담담한 시선일 수 있다. 하지만 진짜는 아마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도 ‘같다’란 것.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얘기. 그건 여성이라서 남성이라서가 아니다. ‘아이’ 속 모든 상황과 얘기가 나와 당신과 우리의 얘기일 수 있단 건 그래서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또 그 인정 속에서 프레임을 씌우는 모든 것에 ‘아이’는 반문한다. ‘이런 사람들의 관계와 연대 그리고 삶도 있다’라고. 개봉은 2월 10일.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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