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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유아인 그리고”…대사 없어도 진심 전하는 방법
‘내가 죽던 날’ ‘소리도 없이’ ‘풍산개’ ‘명량’ 속 뛰어난 연기력의 그들
2020-11-10 13:00:00 2020-11-10 13:00:0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이른바 ‘3요소’. 대사 지문 해설이다. 이 세 가지가 균등하게 자리하고 있어야 대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대본이 아니다. 물론 이건 틀리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맞다고 해도 된다. 최근 들어 영화에서 배역의 대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만 벌써 두 작품이 개봉했다. 기묘한 것은 배역의 대사가 존재하지 않지만 관객 입장에선 그 배역의 대사가 귀로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배우의 감정으로 표현으로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아우르는 연기로 대사가 전달돼 온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 필수 조건이지만, 대본 다시 말해 시나리오의 탄탄한 완성도 역시 한 몫 해야 한다. 여기에 과거와 달리 장르가 세분화 되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성의 방식이 다변화 되면서 생겨 난 상업영화 시장의 흐름으로 주목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두 번 세 번 얘기도 모자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한단 사실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속 배우 이정은
이정은 대사 연기 귀찮아 지던 순간이었다
 
오는 12일 개봉하는 내가 죽던 날은 여성 3명이 주요 인물이다. 하지만 여성 서사라고 규정하기엔 감정의 굴레가 만만치 않다. 감정은 젠더란 이분법에서 적용되는 지점이 아니다. 특히 이 영화가 말하는 감정은 인간 본연의 밑바닥에 숨은 그것을 가리킨다. 상처에 대한 얘기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공통된 흔적이다. 있을 수도 있지만 없다고 치부하고, 없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깊게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그것이다.
 
이정은은 영화 기생충의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가 됐다. ‘기생충이후 실제 할리우드의 러브콜까지 받았다. ‘코로나19’만 아니라면 할리우드 작품에서 이정은의 존재감을 확인했을 수도 있다.
 
그는 이번 작품 선택 배경으로 대사 없음을 꼽았다. 연극 배우 출신인 그는 대사로 전달하는 것에 대한 연기를 넘어서 또 다른 매개체로 관객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점을 고민했었다고. 그때쯤 이 영화를 만났다. 영화 속 이정은이 연기한 순천댁은 섬에 살고 있는 평범한 여인이다. 동생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농약을 먹고 목소리를 잃었다. 그는 이 역할을 위해 목소리를 잃었을 때의 의학적 소견에 따른 소리를 연구하기까지 했다고. 영화에서 그는 목소리를 딱 한 번 낸다. 하지만 그건 목소리라기 보단 울림에 가깝다. 그 목소리 연기를 위해 후시 녹음만 무려 7시간을 소비했다고.
 
이정은이 전달하는 대사 없음의 연기가 압권인 것은 소리가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이 절대 아니란 점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서부터다.
 
영화 '소리도 없이' 속 유아인, 아역배우 문승아
유아인 그냥 대사 부분에 ‘….’만 있었다
 
내가 죽던 날에 앞서 개봉한 소리도 없이는 제목부터 소리를 배제한다. 이 영화는 아이러니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 아이러니한 상황을 위해 두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태인’(유아인)에게서 목소리를 배제시켰다.
 
유아인이 연기한 태인은 말이 없다. 사실 말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는 영화에서도 자세히 나오진 않는다. 그저 유아인의 상대역인 창복’(유재명)의 대사 한 마디로 어떤 사건이 있어서 말을 못하는 것 정도로 마무리한다.
 
이 영화가 태인에게서 말을 빼앗은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 더 타당하다. 이 영화는 오해를 그린다. 악한 목적으로 행한 것은 당연히 악한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선한 목적의 행동이 때론 악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기 위해 이 수단이 된다. 하지만 말은 때론 오해를 더욱 짙게 만드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내가 전하고 싶은 의도와 그 의도를 받아 들이는 또 다른 사람간 전달의 문제가 생긴다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기다릴 뿐이다.
 
소리도 없이역시 그 문제를 고스란히 파고든다. 창복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결과적으로 태인은 그것을 수습하고 되돌려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말이 필요한가. 사실 말은 그저 오해오해를 더하기 만드는 가장 극단적인 매개체를 아닐까. ‘소리도 없이가 제목부터 소리를 지워버린 사연이 그랬을지 모른다.
 
영화 '풍산개' 속 배우 윤계상
윤계상 대사 없는 그 인물’…배우 발돋움
 
앞선 두 작품 이전에 대사가 없던 영화로 가장 큰 주목을 끈 배우는 윤계상이었다. 그는 2011년 영화 풍산개에서 당시로선 기상천외한 설정의 얘기와 인물을 연기했다. ‘풍산이라 불린 한 남자. 정체도 알 수 없다. 그저 누군가의 부탁을 받으면 하루 밤 안에 맨 몸을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가 부탁 받은 그것을 가져오고 또 전달한다. 이런 상상을 넘어선 얘기는 당시 아이돌 그룹 ‘g.o.d 출신이란 꼬리표에서 자유롭지 못한 윤계상에겐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내 뱉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빛과 몸짓 그리고 표정으로 모든 감정을 전달했다. 주인공 풍산이 대사가 없던 이유도 사실 분명히 존재한다. 김기덕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 속 풍산은 이념으로 나뉜 한반도의 현실을 투영시킨 유령 같은 존재다. 그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영화 속 인물이지만 그는 존재 자체로 분단된 한반도를 상징했다. 때문에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존재하면 되는 캐릭터이고 배역이었다.
 
풍산은 영화 속에서 대사가 없지만 말을 못한다는 설정은 사실 없었다. 그저 말을 안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념 그 자체를 부정하는 존재였기에 자유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국경도 의미가 없는 인물이다. 장대 하나에 의지해 휴전선을 넘나드는 판타지 그 자체였다.
 
영화 '명량'의 배우 이정현
이정현 인물에 대한 집요한 탐구
 
배우 이정현은 지독함으로 감독들에게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지독함은 다름 아닌 배역에 대한 탐구다. 영화 명량에서 이정현이 연기한 정씨 부인은 말을 못한다. 하지만 이정현은 도대체 왜 말을 못하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데뷔작 꽃잎부터 가장 최근작인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그리고 개봉 예정인 리미트까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연기한 배역의 모든 인생을 뚜렷하게 설정하고 또 숙지한 채로 배역에 몰입해 나갔다. 그래야 했단다. 그래야 현장에서, 카메라 앞에서 그 인물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게 된다고.
 
다시 돌아와 비하인드 스토리다. ‘명량에서 정씨 부인이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사실 대본에 명시돼 있던 설정이 아니다. 그저 말을 못하는 정씨 부인이었다. 하지만 이정현이 김한민 감독에게 끊임없이 되묻고 되물었단다. 결국 김한민 감독과 이정현의 답변과 또 이어진 질문으로 정씨 부인이 말을 못하게 된 사연, 그래서 영화 속 남편인 진구와의 관계 설정 여기에 명량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정씨 부인의 개연성이 만들어졌다고.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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