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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내가 죽던 날’, 그리고 당신이 살아난 그 날의 ‘희망’
일상 무너진 그 사람, 죽을 만큼 고통스런 순간 속 위로와 공감
‘그가 죽던 날’ 바라본 ‘자아’, 그리고 마주보게 된 ‘진심의 위로’
2020-11-05 00:00:01 2020-11-05 00:00:01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전형성을 뒤흔든다. 일반적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는 구조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스토리는 형식일 뿐이다. 이 영화는 감정을 따라가야 한다. 감정은 공감이다. 영화 속 세계가 만들어 낸 상황에 빠진 세 인물의 현실은 고단하고 지리멸렬하다. 벗어나려고 노력할수록 늪처럼 빠져 든다. 포기해야 할까. 그 늪에 빠져본 사람들은 안다. 아니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도 안다. 포기가 안 된다. 그게 사람이다. 빠져 나와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고 싶다. 밑으로 꺼져만 가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다. 그게 사람이다. 그 순간 누가 손 하나 내밀어 준다면, 그렇게 허우적대고, 또 안간힘 쓰고 버티지 않아도 될 텐데. 그저 손 하나 뿐인데. 그 말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이 이렇게 말한다. 죽고 싶다. 죽어야 끝날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건 살고 싶단 얘기다. 바닥까지 떨어지고 더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껴진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은 내 몸 안에서 날 옥죈다. 이젠 좀 벗어나고 싶다.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것 인가. 그게 문제다. 사실 그 방법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데 말이다. 결코 어렵지도 않은 그게 뭐라고.
 
 
 
현수(김혜수)의 처연한 눈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잠을 못 잤다. 못 잔 건지 안 잔 건지 모르겠다. 사실 숨을 쉬는 건지, 숨이 날 쉬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수는 경찰이다. 남편과는 이혼 소송 중이다. 수사 도중 뜻하지 않은 사건까지 일으켰다. 개인적으로, 또 공적으로 현수는 사면초가다. 경찰대 출신의 전도유망했던 현수는 승진을 앞두고 곤두박질친다. 자신도 몰랐다. 이제 겨우 인생의 전반전을 시작하지도 못한 것 같은데 말이다.
 
복직을 신청한다. 징계 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 현수는 징계 대상자다. 선배 경찰은 제안한다. 복직 이전 한 사건의 마무리를 부탁한다. 복직을 위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줄 심산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한 섬에 살고 있는 소녀 세진(노정의)이 자살했단다. 세진은 그의 아빠가 연루된 사건의 중요 증인이다.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이 섬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세진이 폭풍이 몰아치는 날씨에 절벽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 골치 아픈 사건이다. 선배 경찰은 현수에게 이 사건의 설거지를 맡긴 것이다. 그저 섬을 찾아가 주민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세진의 사망 보고서를 작성하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우선 경찰 내부의 시선이다. 그는 동료 경찰과 불륜을 저질렀던 누명을 쓴 상태다. 이혼 소송 중인 변호사 남편의 모함이었다. 실제는 변호사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인 데 말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결국 현수는 어디로도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가 됐다. 가정도 파탄이 났다. 경찰 동료들도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포기하면 밑으로 빠져든다. 현수는 죽을 수 없다.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잡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이제 짐승으로서의 본능만 남은 상태다. 간단한 사건 마무리 보고서였지만, 본능처럼 매달린다. 그 안에서 본능이 촉을 건드린다. 촉이 현수를 일깨웠다. 그건 사실 현수 본인이 침잠하는 스스로를 봐버린 것이다. 침몰하는 자아를 목격했다. 그건 바로 세진이다. 현수는 세진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던 자아를 목격했다. 죽어가는 자신을 놓을 수 없다. 현실의 나도 죽어가고 있다. 현수는 필사적이 됐다. ‘돌아가기 위해서란 목적은 이제 핑계가 됐다. 그는 살아야 했다. 죽은 세진을 되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CCTV속 세진의 눈빛에서 자신을 봐 버렸다. 내가 죽는다. 아니 내가 죽었다. 난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데.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섬에 사는 순천댁(이정은)은 말을 못한다. 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다. 세상은 외면했다. 그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농약을 들이 마셨다. 외쳐야 할 목소리를 내 던졌다. 목소리를 잃은 것이다. 외쳐야 할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는 필요 없다. 순천댁은 그렇게 죽은 동생의 딸인 조카를 홀로 돌보며 섬 주민들과의 관계도 단절한 채 홀로 지낸다. 죽고 싶을 만큼 외치고 싶은 순천댁지만 그는 죽어도 낼 수 없는 소리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수와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완벽한 역설이다. 삶을 포기한 듯한 현수의 흐릿한 집착은 처연하다. 동생의 한을 담은 순천댁의 가슴은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두 사람은 죽은 세진을 매개체로 연결된다. 현수는 순천댁을 통해서, 순천댁은 현수를 통해서 무언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세진의 죽음이 가리키는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한 꺼풀씩 드러나는 속살은 비밀이 아니다. 현수의 상실을 채워주는 마음이다. 순천댁의 마음을 채워주는 포용이다. 이제 현수도, 순천댁도 그리고 죽은 세진도 어느덧 동질감이란 감정의 테두리 속에서 서로를 보듬고 있는 뚜렷한 손길을 드러낸다. 이건 연대가 아니다. 공감이 아니다. 인정도 아니다. 그저 위로일 뿐이다. 들어주는 것일 뿐이다. 그게 뭐라고. 우리 모두가 외면하고 있던 티끌만한 관심일 뿐이다.
 
내가 죽던 날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제목 그대로 영화 속 현수와 순천댁 그리고 세진은 모두 죽었다. 마음이 죽었고, 몸이 죽었고, 또 머리가 죽었다. 그냥 그들은 죽은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세상이 그들을 죽였다. 사실 현수도 순천댁도 세진도 살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있다. 그들은 너무도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었다는 세상의 시선에 사로 잡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잔인하다. 세상의 시선이 잔인하다. 세상의 위압이 잔인하다. 그래서 세상이 나쁘다. 하지만 그렇게 몰아 붙일 수만도 없다. 그 세상을 만든 게 바로 우리다. 영화는 복잡다단하게 느껴지고, 또 함축과 은유가 뒤덮인 불편한 세상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건 그저 허울일 뿐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지점이 바로 그 허울이다. 그 허울에 갇혀 허우적대는 나 그리고 당신 그리고 우리의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그럴 필요 있을까. ‘내가 죽던 날은 지금의 당신을 지배하는 자아와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자아의 충돌을 어떻게 직시할까. 영화 마지막 현수의 시선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현수는 이미 말했었다. “죽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려 했다. 그런데 그걸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 한 사람이.” 아마 혹시 이 영화가 그걸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죽을 만큼 힘들어도, 살아갈 만큼 고통스럽진 않을 것이라면 그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내보라고.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내가 죽던 날이다.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전하는 가장 완벽한 문장. ‘내가 죽던 날이다. 개봉은 오는 12.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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